제 목 : 2019년 3월 24일 - 헛된 경배를 정죄한 예수님(막7:1-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3-24 |
첨부파일: 헛된 경배를 정죄한 예수님.hwp(21K) |
헛된 경배를 정죄한 예수님(막7:1-8)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을 해산시켰다. 그 다음 날,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은, 또 다시 예수님에게 몰려왔다.
그러나 (요6장)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주지 않고,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하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먹을 것을 주지 않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버렸다.
그 후에 예수님이 게네사렛 땅으로 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모든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헛된 경배를 정죄한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을 섬겨도, 헛되이 경배하면 받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서, 헛된 경배를 예언했다.
헛된 예배는 이사야 시대와, 예수님 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똑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똑같은 위험이 도사릴 수 있다.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했다면 회개하자.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자. 그래야 하나님이 나의 경배, 곧 나의 예배를 기쁘게 받는다.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크게 4종파로 나누어졌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파, 에세네파였다.
이들 각 종파에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서기관들이 있었다. 요즘 말로, 서기관들은 각 교단 신학교 교수들에 해당된다. 그들은 때때로, 율법교사라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랍비라 불리기도 했다. 갈릴리에 살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3:6).
그래서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을 지지하는 헤롯당과, 그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구해서,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갈릴리로 파송되었을 것이다(3:22).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바알세불, 곧 사탄이 지폈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귀신의 왕인 사탄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예수님은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자신은 사탄을 쫓아내기에, 사탄보다도 더 강하다면서, 하나님임을 드러냈다. 다시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었는데, 이번엔 아주 뛰어난 자들이 파송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들”이라고 하지 않고, 일부러 “서기관 중 몇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책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여 없앨 수 있을까? 예루살렘에서부터 오는 동안, 그들은 줄곧, 그 한 가지 문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갈릴리에 이르러, 쉽게 예수님을 찾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기회를 얻었다.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이 무엇인가?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위해 기록했다. 유대인과는 달리 “부정한 손”의 의미를 모르기에 “씻지 아니한 손”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꼭 손을 씻고, 그 후에 음식을 먹었다. 위생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했다.
손을 씻지 않은 채로, 음식을 먹으면,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으로 간주했다. (요2장)을 보면,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가 여섯이 놓여있었다(6).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을 물이, 바로 그 돌항아리 안에 들어있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꼭 손을 씻었다. 그들에게는 그 일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도 않고서 떡을 먹는 것이었다. 원문에는, 떡 앞에 정관사가 있다. “그 떡”이라는 뜻이다.
오병이어 이적 후, 남은 떡을 거둔 것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 제자들은 떡이 가득한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는 가운데, 제자들은 생각 없이, 바구니에 남아있는 떡을, 손으로 집어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벳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했을 때에,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손을 씻고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먼저 손을 씻고, 먹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도 음식을 들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다(눅11:38).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수로, 손을 씻지 않은 것이 아니다. 떡을 먹기 전에, 손 씻는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심각하게 여겼기에, 예수님을 책잡을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고 여겼다. 여기서 어떤 모습으로, 사람을 보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을 책잡고, 모함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 파송되었다. 그래서 그들 눈에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행하는 표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점만 찾았다. 그러므로 중심이 바로 설 때, 올바로 볼 수 있다.
2.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3-4).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은, 설명하는 내용이다. 로마 사람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이, 무슨 문제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지키는, 장로의 전통을 설명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주의자들이고, 사두개인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따랐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바리새인들과, 또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유대인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켰다. “장로들”은 “조상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본시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호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울타리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 있는 울타리에 가려서, 그 안에 있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장로들의 전통에 가리어, 하나님 말씀이,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권위가 여겼다는 점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문제요, 이단적인 요소이다.
사실 성경에는, 떡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 전연 없다. (출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맞으려고, 그들의 옷을 빨았다.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들은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물로 몸을 씻어야 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에도 없는 전통으로 만들어서 지켰다. 3가지 실례를 들어서, 그들이 지킨 전통을 설명했다. ① 손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성경에는 부정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부정한 짐승들이 있고, 사람의 시체도 부정하다. 어떤 병에 걸려도, 부정하게 여겨졌다.
또 이방인들도 부정하게 여겨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한 것들을 만질 수도 있기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서, 부정함을 없애야 했다. 씻지 않은 손,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은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의 손끝에 붙어 있다가, 음식을 먹을 때, 그 귀신이 사람 몸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비록 손으로, 아무 것을 만지지 않더라도,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잘 씻어야만 했다.
②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뿌리고야 먹었다. 한글성경은 ‘물을 뿌린다.’로 번역했다. 마치 시장에서 사온 것들에 물을 뿌려야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본래의 뜻은 목욕했다는 말이다. 시장에서 돌아와서, 온 몸을 씻고 난 후에, 비로소 음식을 먹었다. 그만큼 부정함을 씻는 일에, 철저했다는 뜻이다.
③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었다. 3종류의 그릇이 나오는데, 다 음식을 담을 때, 사용되는 그릇들이다. 잔에는 포도주 같은, 액체를 담는다. 주발은 액체 음료를 잔에 따르기 전에, 담아놓는 주전자와 같다. 놋그릇에는 떡과 같은 음식물을 담는다. 시장에서 식기들을 사올 때는, 물로 씻어야 했다.
이방인이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먹을 때마다, 이것들을 씻어야 했다. 부지중에 부정한 것에 닿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손을 잘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시장에서 돌아와 씻고 먹었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었다. 이외에도 지키는 전통은 여러 가지였다.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예수님을 겨냥했다. 제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은 것은, 예수님이 잘못 가르쳤으니,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경을 어겼다고 말하지 않고,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의 문제는,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두었다는데 있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의하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가 있었다.
어떤 랍비가 옥에 갇혔을 때, 떡과 마실 물이, 조끔 나왔다. 그러자 그 랍비는,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그 물로 손을 씻었다. 이렇게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부정을 씻어내는 일에 철저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부정하게 떡을 먹었으니, 이들은 예수님을 책잡을 구실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질책한 예수님(6-7).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 것은 사실이기에,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장로들의 전통이, 절대적 권위나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들어서, 예수님을 비난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예수님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 권위와 구속력을 가질 뿐이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라 했다. 그들의 겉과 속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했다(마23:27).
무덤의 겉은, 하얀 회로 칠해져 있어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옳게 보였다. 그러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다.
선지자 이사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겼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의 외식을 질책하며, 그들에게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촉구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헛된 제물을, 바라지 않았다(사1:13).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1:16). 하나님은 그들의 깨끗한 마음을 바랐다. 선지자 이사야는 마지막에서도, 같은 사실을 다시 반복했다. 하나님이 바라는 예배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참 예배다(66:2-3).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질타하며, 이사야가 그들에 관하여, 잘 예언했다고 했다. 이사야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언과 같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록하였으되”라고 하면서, (사29:13) 말씀을 인용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멀었다. 그러니 그들의 경배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이 백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서 가르쳤다. 바로 그들이 지키던, 장로들의 전통이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경배는 헛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마지막에 나온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장로들, 곧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 곧 사람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
그러니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했을 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다. 그 결과 그들의 경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는, 헛된 경배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입술로는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듯하지만, 실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지 않는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람의 말에 초점을 맞춘다면, 헛된 예배가 된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라. 성경, 즉 하나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는 참 예배가 된다. 언제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라.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며, 하나님이 기쁘게 받는 참 예배다. 헛된 경매는 무엇인가?
세상적인 기준을 버리지 못하면, 결단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사람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부분적인 것을 절대화하면, 전체적인 진리를 놓치게 된다. 헛된 경배가 아니라, 진실한 예배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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