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3월 10일 - 바다 위로 걸어온 예수님(막6:45-5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3-10 |
첨부파일: 바다 위로 걸어온 예수님.hwp(22K) |
바다 위로 걸어온 예수님(막6:45-52)
(요6장)을 보면,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명을 먹였다. 사람들은 이 일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한다(15).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한 다음날,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온다. 예수님이 주는 떡으로, 다시 배부르기 원했지만, 더 이상 떡을 주지 않고, 그 대신 생명의 떡을, 사모하라고 말씀한다.
사람들은 육신이 배부르기 원했지만, 예수님이 배불리 먹을 떡을 주지 않자,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예수님에게, 끌리지 않았다. 또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 되려는 의향이, 전혀 없음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67)고 물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했다. 예수님이 행한 오병이어의 이적을, 똑같이 경험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
단지 예수님의 제자들만, 영생을 이해하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음이 둔하여, 예수님이 떡을 떼던 일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이, 그들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1.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한다(45-46).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이 왜 무리를 보냈는지, 본문에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는 나온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세상 나라의 임금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요18:36),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
계속해서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이때도 마귀는 무리를 이용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고 하자, 무리를 해산시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쳤다.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서,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갔는데, 요단강 어귀 동쪽에 위치한 ‘벳새다’로 갔다(눅9:10). 이곳은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여, 벳세다 율리아스라고 이름 했다. 같은 이름이니, 헷갈리지 말자.
“즉시” 그만큼 상황이 긴급했다. “재촉하사”는 “강제로”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그곳에 머무르지 않게 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속히 주님 나라가, 임하기만 바랐다. 그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무리로부터 떼어놓았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 자신들이 타고 왔던 배에 올랐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
예수님에게 “어찌하여”라고, 묻지도 않았고, 또 “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예”라고 하면서, 순종했다. 이것이 참 제자의 모습이며,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믿음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음을 깨닫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인 예수님은, 나의 연약함을 알고 동정한다. 그래서 (롬8:34中)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지금도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애타는 삶을 살고 있다면,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상을 이길 힘을 줄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친히 나를 찾아올 것이다. 성도는 분주할수록, 하나님께로 돌아가 힘을 얻어야 한다.
이 땅에서 맡은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 대신, 인간적인 욕심을 따르기 쉽다.
2. 예수님은 나를 찾아온다(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날이 저물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벳새다(벳새다 율리아스)를 출발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 서편에 있는, 또 다른 벳새다로 가려고 했다. 서로 간에 거리는, 그다지 멀지가 않았다. 해변을 따라서 가면, 금방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다.
(마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즉 그들이 예상했던 항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역풍이 불었다. 그 때의 역풍은 큰 바람이었고, 파도도 일어났다(요6:18). 그래서 그들이 탄 배가, 바다 가운데로 밀려났다.
순종하는 자에게도, 역풍이 있을 수 있다. 바람과 물결로 인하여, 제자들이 힘들어하는 동안, 주님은 욱지에 있었다. 예수님은 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보살피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거센 바람과 흉흉한 물결이라도, 결코 그들을 해할 수 없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돛을 달 수 없었기에, 제자들은 돛을 내리고, 노를 저었다. 큰 바람과 밀려오는 파도 때문에, 노 젓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한 곳으로 가기 위하여, 계속해서 힘겹게 노를 저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보셨나?
예수님은 높은 산에 있고, 제자들은 낮은 바다 가운데 있었기에, 그들을 보셨나? 그런 것은 아니다. 때는 밤 사경이었다. 새벽 3시에서 새벽 6시 사이로, 어두울 때였다. 또한 그들이 탄 배는, 육지에서 이미 수 리나 떨어져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육안으로 그들을 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기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다 보고 계셨다. (시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예수님에게는 밤과 낮이 같다. 어둠과 거리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은 다 보고 계신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다 알고 있다. “얘들아,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느라, 어두운 바다 위를 헤매지 않고,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았다. 바람과 물결에,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고, 신속하게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48下) “…지나가려고 하시매”(파렐코마이)는 ‘접근했다, 곁으로 왔다’이다. 제자들 눈에는, 예수님이 스쳐 지나쳐가려는 듯이 보였다. 그만큼 신속하게, 그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바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러기에 바다를 길 삼아서, 그 위로 걸어왔다.
삶에 풍랑이 일고 있는가? 예수님은 다 보고 계심을 믿기 바란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힘들어 할 때에, 내가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신속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나를 풍랑 가운데서 구원한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외면하지 않는다.
3. 예수님은 나를 구원한다(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지금 바다 위를 걸어서, 자기들을 찾아오리라고는, 전연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은 바다 위를 걷지 못한다. 몸무게 때문에, 바다 위에 서면, 빠지고 만다. 따라서 생각하기를, 몸이 없는 유령이, 바다 위를 걸어서, 자기들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여기고, 소리를 질렀다.
(마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그들은 무서워서(에타락산, 타랏소) 소리 질렀다. 유령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해칠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령을 무서워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모두 다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놀랄 뿐이었다.
그래서 무서움을 느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무서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둠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은, 분명히 분간할 수 있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는가? 풍랑으로 인해서 겪어야 했던, 육체의 고통도, 유령이라 여기면서 당해야 했던 심적인 고통도, 순식간에 눈 녹듯 했을 것이다. 지금 인생의 풍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히13:5中)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신속히 나를 찾아와서 말씀한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향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란다.
(마14:28-30)을 보면, 본문에는 생략된 내용이 나온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르고, 만일 주님이면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고 하자, 예수님이 오라고 하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는데,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지도 말고, 풍랑을 바라보지도 말자. 그러면 바다에 빠진다.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만 바라보자. 그리하면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다. 언제나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바다 위로 걸어가기를 바란다.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통당할 때 찾아왔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이적으로 그들을 구원했다.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이적이 나타난다.
예수님이 힘겹게 노 젓는 제자들을 보신 것도 이적이고,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으신 것도 이적이다. 정확하고도 신속하게, 제자들에게 오신 것도 이적이고, 또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친 것도 다 이적이었다. (요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그들이 탄 배가,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했다. 육지에서 수 리나 떨어져 있던 배가, 순간적으로 육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이것도 역시 이적이다. 예수님은 영원하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같은 이적들을 행했다.
그러면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을 보면서,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51下)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라니.”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놀랐다. 물론 그 때는 무서움을 느끼면서, 부정적으로 놀랐다(타랏소, 함께 뒤흔들다, 불안하게 하다).
그러나 이 때 ‘놀라다’(엑시스테미, 밖으로 나와 섰다)는 단어다. 예수님께 깊은 경외심을 느끼면서, 긍정적으로 놀랐다. 그러므로 (마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 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으로 믿고 절했다(경배했다).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적들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다.
풍랑을 잔잔하게 했다. 본문 바로 직전에,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위태한 일들이 새로 생기면, 그들은 또다시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한, 많은 이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태껏 예수님에게,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그들의 신앙을 분명히 예수님께 고백했고, 경배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먼저 영적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무엇이 그들을 달라지게 만들었는가?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둔한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누구인 줄, 그들이 깨닫도록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의 둔한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도 이렇게, 믿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그들이 힘들어 할 때, 예수님이 찾아와, 전능한 능력으로, 구원함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돌보심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체험적인 신앙이 되었다.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풍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바로 이 깨달음이, 그들을 달라지게 했다. 이 깨달음이, 그들을 남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찾아와 구원한다. 예수님이 늘 나를 보살피기에, 내 마음도 늘 평안할 수 있다.
날마다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담대하게 바다 위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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