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3월 3일 -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3-03 |
첨부파일: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hwp(21K) |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막6:35-44)
예수님은 수많은 이적을 행했다. 그 중에 4복음서에 모두 다, 기록된 이적은 2가지다. ① 예수님의 부활 ② 오병이어의 이적이다.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였다. 여자와 아이를 합한다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경험한, 예수님의 이적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려주고, 배불리 먹여주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면, 이보다 더 좋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다(요6:15).
사람들은 이방인 분봉 왕인 헤롯과 빌립,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내쫓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서, 오지 않았다(요18:36上).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한 다음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다. 예수님이 주는 떡으로, 배부르기 원했다(요6:26).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떡을 주지 않고, 썩을 양식을 바라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사모하라고 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바로 생명의 떡인 예수님이었다(요6:35). 사람들은 예수님이, 먹을 떡을 주지 않자, 더 이상 예수님께 끌리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66). 이 때 예수님은, “너희도 가려느냐?”(67)고 물었다. 그 때 베드로는 (68中)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
사람들은 썩을 양식을 원했고, 제자들은 영생하는 양식을 원해서 남았다.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고백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그들의 믿음은 더 깊어졌다. 따라서 우리도, 오병이어의 이적을 살펴보면서, 우리 믿음도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1. 제자들이 내린 결론(35-36).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벳새다 빈들에, 큰 무리가 모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여러 가지로 가르쳤다. 병자들도 고쳐주면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때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같은 내용 (마14:15) “저녁이 되매…”라고 했다. 아마도 이른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 이후로도, 많은 일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내용 (요6장)을 보면, 예수님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빌립에게 (6:5下)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을 시험하심이었다. 빌립은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7上)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했다. 예수님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느냐는 문제를, 숙제로 남기고, 무리들을 가르치며, 병을 고쳐주었다. 아마 빌립은, 다른 제자들과 상의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숙제를 풀기 위해, 온 종일 함께 씨름했을 것이다. (막6:35~36)으로 돌아가자. 시간이 흘러서 저녁이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자기들의 해답을 말씀드렸다. 자신들의 결론을 뒷받침할, 두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막6:35-36).
① “이곳은 빈들이기에”(35)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② “무리를 보내어”(36)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조처를 취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무리를 그 곳에서, 빨리 해산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기에, 각자가 흩어져, 주변에 있는 작은 촌이나, 그보다 조금 더 큰 마을로, 찾아갈 수 있다. 인근의 벳새다, 요단강 건너 가버나움과 더 나아가 고라신으로 갈 수 있으니, 찾아간 촌이나 마을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고, 잠잘 처소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온종일 씨름해서, 얻은 결론이었다. 제자들은 영적으로 무딘 사람이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이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풀어보라고 준 문제가, 사서 먹이라는 문제였을까? 제자들이 생각한 답은, 그 주변에 위치한, 촌과 마을들이었다.
예수님이 기대한 답은, 이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에게 있다. 예수님이 이들을, 먹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예수님은 전능하다. 에벤에셀로 나를 여기까지 도우시고, 임마누엘로 지금도 나와 함께 한다. 여호와 이레로 나를 위하여, 모두 다 준비한다.
2. 예수님이 밝힌 힌트(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제자들이 문제를 풀지 못하자, 예수님이 힌트를 주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서, 무엇을 사먹게 하자는 식으로, 문제를 풀었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 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렸다. 예수님이 권능을 행한 대로, 똑같이 권능을 행했다.
갈릴리 가나의 혼례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들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의 권능을 제자들에게 준다면, 그들도 얼마든지 먹을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빌립이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 말은 예수님에게, 어떤 집에 먹을 것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그들의 절망적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품꾼 한 사람이, 일당이 데나리온이었다. 그들이 가진 돈을, 몽땅 사용해서 구입해도, 문제점은 남는다.
그 많은 떡을, 어디 가서 한꺼번에 다 살 수 있나? 샀다고 해도, 누가 벳새다 빈들까지, 운반할 수 있겠는가?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 뻔했다. 여기서 그들이, 잊고 있는 사실은, 그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잊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한한, 권능을 잊고 있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다.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고 묻고, 그들에게 명했다. “가서 보라.”고 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와 같이 묻고, 명한 의도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함이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통해, 자기들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은 자기들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리저리 흩어져서, 찾아보았다. 알아보니, 떡5개와, 물고기 2마리뿐이었다.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서 찾은 것이었다(요6:8-9). 아이가 먹을 음식이었으니, 분명히 양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떡은 김밥 정도의 크기, 물고기는 ‘대하’만한 것이다.
샌드위치처럼 떡 사이에, 물고기를 넣어서, 몇 번 먹으면 끝난다. 그러니 이것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제자들은 가진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할 수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라는 바였다.
우리는 할 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가? 작은 헌신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면, 예수님의 역사와 놀라운 권능을, 보게 될 것이다. (39-40)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마14:13)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했다. 그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하기를, 그 모든 사람을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으니(요6:4), 3-4월의 봄이었다.
늦은 비가 흠뻑 내린 뒤라, 푸른 잔디가 많았을 것이다(요6:10). 이때가 지나가고 나면, 강한 햇볕에, 잔디는 모두다 말라버린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사람들을 떼로 앉혔다. 본문에 의하면,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았다.
그러므로 44절 말씀처럼, 그 때 그 자리에 모인 수가, 오천 명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그 수는 남자만을 말한다. 아무튼 예수님의 명을 따라서,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떼를 지어 앉게 했다. 혼돈이 질서로 바뀌어졌다.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도, 만들어졌다.
이제 먹을 음식만 제공되면 된다. 여기에서 제자들의 순종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할 수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다. 믿음도 부족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명할 때, 그들은 묻지도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다. 믿음도 깊어졌다.
내가 순종하면, 예수님의 권능을 본다. 나의 믿음도 성장하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믿음도 자라지 못한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낸다(요14:21). 늘 말씀에 순종하자.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날로 믿음이 깊어지기를 바란다.
3. 예수님이 보여준 해결(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준 문제를, 풀지 못했다. 제자들에게 힌트를 주었지만, 그들은 둔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실제로 그들 앞에서 문제를 풀어서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자 했다. 또한 장차 이루어질 믿음의 역사, 오병이어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떡을 뗐다. 감사하는 믿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과, 기적을 확신하는 모습이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제자들에게 주어”다. “주다”의 시제가 미완료형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주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의 이적, 곧 창조의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바구니를 들고 다녔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바구니에, 떡과 물고기를 가득 채워주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었다.
바구니가 비면 다시 되돌아와서, 예수님의 손에서 만들어진 떡과 물고기를 가득 채워서, 가서 나누어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물론 이때,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천군천사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떡과 물고기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 결과 (42-44)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풀지 못한 문제를, 시원하게, 멋지게 다 해결했다. 문제가 해결한 후에, 된 결과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① 다 배불리 먹었다(42). 빌립이 제안한 것처럼, 사람들이 그저 조금씩,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원대로, 다 주게 했다(요6:11) . 그래서 그들 모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불리 먹었다. 이 때 그들은, 예수님이 창조한, 신선한 떡을 먹었다.
② 남은 음식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했다(43). 예수님이 명한 대로, 제자들은 남은 음식을 다 거두었다(요6:12). 그러자 그들이 거둔 것은, 정확하게 각자의 바구니에 가득 찼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배불리 먹을 만큼만 남았다. 예수님은 은혜는 풍성하다.
③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다(44). 그 곳에는 여자와 어린이들도 있었다(마14:21). 따라서 남녀 어른들의 수만 일만 명이었다. 물론 아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합치면 이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춘다. 또한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내려준다. 일반 은총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모두 다 먹여주었다. 따라서 문제가 생겼는가? 어려운 일이 생겼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풀어보라고 준 문제다. 예수님이 나의 믿음을 키워주려고,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정답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꾀를 쓴다고 해서, 숙제는 풀리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없다. 가진 것도 없다. 나를 낮추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해야 한다. 정답은 언제나,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해결하자. 나는 오병이어처럼 보잘 것이 없지만, 나를 예수님께 드리자. 예수님의 손에 올려놓으면, 주님은 나를 귀하게, 풍성하게 쓴다. 나를 통해 예수님을 나타낸다. 감사하는 삶에, 이적이 나타난다. 말씀에 순종하기 바란다.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라.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그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이적을 통해 더욱 더 깊은 믿음을 갖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19년 2월 24일 -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막6:30-34) | |
다음글 : 2019년 3월 10일 - 바다 위로 걸어온 예수님(막6:45-52)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