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2월 24일 -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막6:30-3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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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예수님(막6:30-34)
예수님은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해서 놀라운 이적을 행했다.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을, 모두 다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다(요21:25). 본문은 이른바 “오병이어 이적”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어떤 이적들도 행할 수 있다. 이적을 행한 이유는,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에, 예수님은 얼마든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가 받을 수 있었지만,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이적을 베풀고, 권능을 행했다.
귀신을 내쫓은 것도, 귀신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병든 자를 고친 것도,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린 것도, 그의 가족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기에,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 아울러 못난 나를 불쌍히 여기듯이, 성도들인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1. 예수님은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사도들은 예수님께 돌아와 모였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는 스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갈릴리의 각 마을로 보냈다. (사명을 주어) “보내다”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이 “사도”다. 사도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 곧 사도들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주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권능을 행한 대로, 그들도 권능을 행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했다(12). 이것은 예수님이 전한 내용을, 압축한 것이다(1:15).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그대로 가르쳤다.
예수님이 명령한대로, 그들이 나갈 때,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8~9). 신고 있는 신과, 옷 외에는, 따로 신과 여분의 옷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부족한 것이 없었다(눅22:35). 주님이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신뢰했기에, 예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하면서, 삶과 사역을, 전적으로 돌보셨다. 이제 사명을 다 마치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그 곳에서, 배를 탔다(32). 따라서 그 곳은, (마9:1) 말씀처럼,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리는, 갈릴리의 해변 마을, 가버나움이었을 것이다.
그 곳으로 되돌아왔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곧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다 모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예수님에게 고했다. “낱낱이”라고 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렸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그들이 고하기 전에, 이미 그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알고 계셨지만, 그들이 낱낱이 고할 때, 일일이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따라서 좋은 일이 있는가? 예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아뢰면, 예수님은 기뻐하면서,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
어려운 일이 있는가?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께 아뢰면,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 귀기울여줄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가까이 한다(신4:7). 예수님께 낱낱이 아뢰자. 예수님은 일일이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며, 나에게 풍성한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예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삶을, 낱낱이 고하자. 그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함께 할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남들을 긍휼히 여겨, 그리스도의 날에, 예수님께로부터 큰 위로와 칭찬을 받기 바란다.
2.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이해한다(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사도들이 전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잠깐의 쉼이 필요함을 알았다. 사실 그들은 고단했을 것이다. 먹을 양식을 준비해서, 떠난 것은 아니다. 잠잘 곳이, 정해져있던 것도 아니다(6:10). 그들은 여호와 이레로, 주님이 예비한 곳에서 잠을 자며, 공급하는 양식을 먹었다.
열심히 사람들을 가르쳤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았고, 각종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행했다. 분명히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무리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고(막3:20), 잠잘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으니, 심신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 받고 가면, 또다시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왔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피곤을,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예수님도 피곤할 때에는,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4:38).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따로 한적한 곳,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잠깐 쉬기를 바랐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으로 갔다(1:35, 1:45). 예수님은 제자들도,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는 것이 필요함을 아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알고, 나의 필요를 채워준다.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몰려드는 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배를 타는 것이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는, 음식도 먹고,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쉴 만한 곳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다. 그들을 태운 배는, 무리를 떠나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그들의 행선지는, ‘벳새다’였다(눅9:10). 벧(집) + 짜야드(사냥꾼), 벳새다는 자그마한 고을이었다. 벳새다 인근에는, 빈 들이 있었다(35).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해변에 배를 정박시킨 후, 인근의 빈들로 가려고 했다. 벳새다에서 제자들이 잠시 쉬기를 바랐다. 전도 여행에서 막 돌아왔는데, 또다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벳새다 빈들로 인도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14:13)에 의하면, 예수님이 “들으시고” 배를 탔다. 이 때 예수님이 들은 내용은, 침례 요한이 분봉 왕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해서,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장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열두 제자들도, 그 소식을 다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만 아니라, 제자들도 마음이, 무척 아팠을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요1:37). 더군다나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 자기가 목 벤, 침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여겨,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벳새다로 갔다.
예수님은 아직,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가버나움과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쪽해변에 위치해 있었다. 갈릴리로 흘러내리는 요단강을 가운데 두고, 요단강의 서쪽에는 가버나움이 있다. 요단강의 동쪽에는, 벳새다가 있다. 가버나움과 벳새다는,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행정 구역은, 서로 달랐다. 가버나움은 분봉 왕 헤롯이, 벳새다는 분봉 왕 빌립이 다스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헤롯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벳새다로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제자들을,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다.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알기에,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나를 인도한다. 내가 피곤할 때, 준비한 쉼터로 인도한다. 내가 위태로울 때, 피난처로 나를 인도한다. 내 마음이 아플 때, 큰 위로를 내게 베풀기에, 늘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맡기면서, 살기를 바란다.
3. 예수님은 나를 돌본다(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가버나움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은 각기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많은 역사가 나타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벳새다를 향하자 보고, 즉시 젊고 건강한 남자들은, 벳새다를 향해 달음박질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가급적이면 빠른 걸음으로, 벳새다를 향했을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 일행을 태운 배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벳새다를 향했다. 그들은 배 안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잠깐이지만 모처럼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적어도 배를 타고 있는 동안만큼은, 무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벳새다에 이르렀다. 달려온 사람들은 이미, 그 곳에 먼저 와있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곳에 온 사람도 많았다(마14:13, 눅9:11). 왜 많은 사람들이 왔나?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요6:2). 그들은 병을 고치기를 바랐다. 예수님의 권능을 구경하고 싶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 곳에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말 귀찮은 사람들이네. 이곳에 배를 대지 말고, 저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먼 곳으로 옮겨가자.”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려, 그들을 만나주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배 안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을 뿐, 한적한 시간은, 잠시 배를 타고 있을 때뿐이었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벳새다 빈들에 큰 무리가 모였다. 떡을 먹은 남자만, 오천 명쯤 되었다(44). 여자들도 그만큼 되었을 것이다. (요6:9)에, 그 곳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었으니, 그 곳에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할 때가 아니었다.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이기에, 많은 자녀들을 낳아서, 기를 때였다. 그러니까 그 날 벳새다 빈들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다. 아니 2-3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정말 큰 무리였다. 예수님이 사역한 기간 중에서, 이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여겼다. 목자 없는 양은, 살 수 없다. 목자가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지 않으면, 양은 굶어죽고 만다. 또한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양은 맹수의 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겼을 때, 그저 감정적으로만 동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목자가 그의 양을 돌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친히 역사하면서, 그들을 돌보셨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여러 가지로 가르쳤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했다(눅9:11).
세상 나라들, 사람들의 나라 일이 아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쳤다. 지금까지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지만,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병도 고쳐주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목자가 되어서, 영과 육을 동시에 돌보았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께, 어떠한 모습으로 나아오든지 간에, 예수님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않는다. 언제나 기꺼이 나를 영접한다. 나를 불쌍히 여기며, 귀를 기울여 준다. 나를 불쌍히 여기며, 모든 필요를 이해해준다.
친히 역사하면서,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돌보아준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됨을 감사하자.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자. 그래서 모든 일에,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늘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살아가자.
아직도 나의 주변에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이, 많이 있음을 잊지 말자. 나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향기요, 예수님의 편지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나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못난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주자. 그들의 필요를 이해해주고, 돌보아주자.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날에 예수님께로부터, 큰 위로와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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