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월 13일 - 죽은 자를 살린 예수님(막5:35-4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1-13 |
첨부파일: 죽은 자를 살린 예수님.hwp(21K) |
죽은 자를 살린 예수님(막5:35-43)
오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린 이적을 보여준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도중, 그의 딸이 죽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죽은 딸을 다시 살려서,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를 보여주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기 바란다.
1.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이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실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 그 가운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나음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그의 병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나았다.
그 순간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알고, 무리 가운데서 일부러, 그 여자를 찾았다. 그 여자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자,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따뜻하게 말씀했다. (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말씀하고 있을 때,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그 곳으로 왔다. 그들은 야이로에게, 절망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병든 딸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고 난 뒤에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회당장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중에 끼어드는 것은,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으므로, 이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알려서, 더 이상의 예수님께 수고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
이런 태도는 세상의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예절 바른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야이로 집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었다. 야이로는 “이 일을 어쩌나”하면서 두려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야이로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움은 믿음을 약화시키기에, 믿음으로 두려움을 물리치라고 했다. (출14장)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애굽 군대가 그들을 추격해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다. (삼상17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크게 두려워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떨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담대히, 물매로 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하나님에게는 절망적 상황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의 끝이, 하나님에게는 시작일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절망적인 상황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낙심되는 일이 생겼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라.
믿음은 하나님으로, 우리를 돕게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도, 영의 세계도, 육의 세계도, 또 죽음도 실제로 다스린다. 영적으로 살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렸다. 예수님이 나의 능력이 되사, 나에게 모든 문제를, 이겨낼 힘을 주실 것이다.
2. 야이로의 집(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제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자기의 집으로 향했다.
이때는 무리가 더욱 더 심하게,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을 것이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나은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무리가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했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 3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라오게 했다. 이들 3사람은, 예수님의 측근이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이 사람만 예수님과 함께 했다(막9:2).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도, 이들 3사람만 예수님 곁에 있었다(막14:33). 우리도 이 3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충성스런 일꾼이 되기 바란다. 3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인정을 받으며, 모든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기 바란다.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는, 이미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떠드는 것이 특징이다. 매우 소란스럽다. 3가지 요소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① 슬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큰 소리로 울고, 옷을 찢었다. 그들의 전통은, 옷을 찢는 방법을, 39가지로 자세히 규정하였다. 그래서 장례식에 갈 때는, 이미 여러 차례 찢었던 옷을 입고 갔다.
②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울어주는, 곡하는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슬픔을 자극해서, 울음을 촉진시키는 일이었다. (렘9:17)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곡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했다.
③ 피리 부는 자들을 불렀다(마9:23). 피리 부는 자의 역할도, 역시 장례식 슬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이다. 유대인은 아무리 가난해도, 두 명의 피리 부는 자와, 한 명의 곡하는 여자를 불러야만 했다. 야이로는 유지였으니, 그때 피리 소리, 곡하는 소리, 옷을 찢으며 슬피 우는 소리로 소란했을 것이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자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밝혔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야이로의 딸에게, 아직 목숨이 붙어있다는 뜻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었다.
야이로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다. 왜냐하면 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처럼, 예수님은 곧 그 아이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잠들었다고 했다(요11:11).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잔다고 했다(행7:60).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했다(살전4:13). 그러면 왜 죽음을 잠을 잔다는 했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자다가 깨는 것처럼, 일어날 때가 있다. 언젠가 우리의 호흡도 끝난다. 그 때 우리 영혼은, 우리 몸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후5:8).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잠을 자는 것은, 성도의 영혼이 아니라 몸이다. 육체를 떠나면, 영혼은 즉시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간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몸은 잠을 자다가, 잠자던 몸들은 일어난다(고전15:51~53).
그 때 그들의 몸은 썩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게 된다. 즉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한다.
그때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은 것처럼, 천국 성도들의 영혼도, 부활의 몸을 입는다. 성도의 영혼과 육체가, 온전히 재결합해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된다(롬8:17). 이처럼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성도의 영혼은,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간다.
성도의 몸은 잠들어 있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는 날에, 영화스럽게 변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에 불과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3. 야이로의 딸이 있는 곳(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떠들며 울던 자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눅8: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했다. 야이로의 딸이 죽은 지, 이미 몇 시간이 흘렀다. 따라서 피부 빛도 변했고, 몸도 굳었을 것인데, 예수님은 그가 잔다고 했으니, 예수님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면서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비웃는 자들을 모두 다 내보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3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해도 그대로 된다. 그러나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는데(민19:11),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아이의 몸에 손을 얹어주기를 간곡히 간구했다(23).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참으로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이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았기에, 부정해졌나? 아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는 순간, 그 아이는 살아났다.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의 손을 잡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그에게 “달리다굼”(탈리 쿠미)이라고 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를, 그대로 음역했다. “달리다”(탈예타나, 델리타)는 소녀를 뜻한다. “굼”(쿠미)은 일어나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였다.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바사 사람들이 쓰던,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람어로 말씀했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그 당시 모든 나라들이 공용어로 여기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마가복음은 로마 사람들을 위해 썼기에, 아람어 “달리다굼”을 들으면, 이해할 수 없기에, “달리다굼”(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로 번역했다.
“달리다굼”을 그대로 직역해서 “소녀야 일어라”고 말씀하지 않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씀을 덧붙여 의역했다. “소녀야 일어나라.” 야이로나 그의 아내는, 아침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랑하는 딸을 깨웠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 아이를 깨우듯이, “얘야 이제는 일어나야지”하며 “달리다굼”이라고 했다.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야이로의 딸은 오랫동안 앓아누웠기에, 그의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곧 일어나서 걸었다. 누가 부축해줄 필요도 없었다. 기운이 없어서 겨우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소녀라고, 아이라고, 어린 딸이라고, 나이가 아주 적은 것은 아니다. 그의 나이는 열두 살이다. 결혼할 나이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열두 살 여자에게, 알맞고도 건강한 신체를 순간적으로, 온전하게 창조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는 것을 보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곧 크게 놀라고 놀랐다.
그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은 자를 순식간에 살렸고, 또한 그에게, 적합한 신체를 순식간에 창조했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2가지를 명했다. ①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계했다. 이와 같이 명한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밝히지를 않았다.
사실 그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은, 소문나서 퍼지게 될 것이다. 야이로의 집에서 떠들며, 울던 자들이 모두 다 알고, 야이로의 딸이 걸어 다니면, 마을사람들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고 했다.
②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했다. 소녀의 부모에게 명하신 말씀이었다. 야이로와 그의 아내는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분명 그들은 그대로 뛰어나가서, “예수님이 내 딸을 살려주셨다!”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요6:15) 말씀과 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많이 경계했다. 그 대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그 동안 소녀는, 병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건강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원기가 왕성한 몸이기에, 먹어야 했다.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야이로와 그의 아내는, 조용하게 그의 딸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조용히 그 곳을 떠나,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으로 가실 수 있었다(6:1).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죽음도 다스리는 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죽음은 잠을 자는 것이다. 깨어나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죽은 자를 살린 예수님의 말씀이다.
또 예수님의 풍성한 긍휼도, 다시 깨닫는다. 예수님은 멀리서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지만, 야이로의 집까지 갔다. 소녀의 손을 잡아주고, 먹을 것까지도, 자상히 챙겨주었다. 긍휼이 풍성한 위로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용기를 내어서,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9년 1월 6일 -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막5:21-34) | |
다음글 : 2019년 1월 20일 -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막6:1-6)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