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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년 1월 20일 -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막6:1-6)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9-01-20
  첨부파일: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hwp(21K)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6:1-6)

 

예수님은, 믿음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믿음의 힘이라고 말씀했다. (17:20)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는, 예수님을 믿어서,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믿어서, 그의 죽은 딸이 살아났다. 이처럼 믿음은 대단하다. 그러나 불신앙의 결과도 놀랍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의 권능을, 누리지 못했다. 이처럼 불신앙은, 예수님이 주는 복을 막아버리는, 벽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살아서, 늘 예수님 안에서, 복이 되고도 풍성한 삶을 살기 바란다.

1. 고향으로 가신 예수님(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사렛으로 갔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지만, 한 번도 베들레헴 예수라고 불리지 않고, 항상 나사렛 예수라고 불렸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사렛을 떠났다. 그 후 유대와 갈릴리의,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사역했다. 그러다가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메시아에 대한 (61:1-3) 말씀을 읽었다. 예수님은 그 예언이 응했다고 했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30년 동안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그들의 육신적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자, 회당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크게 화를 냈다(4:28).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어뜨려 죽이려고 했다(4:29). 그 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갔다. 고향 나사렛을 방문한 후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두 번째, 한 번 더,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왜 방문했나? 고향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의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인가? 모두 다 일리가 있다.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가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1) “제자들도 따르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나사렛으로 갔던 것이다. 본문 다음에,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짝을 지워, 각 마을로 보내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으며,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고,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영접 받을 수도 있고(10), 배척 받을 수도 있다(11). 배척받는 모습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을 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따라서 나사렛을 방문한 목적은,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살다보면 형통할 때도 있고, 곤고할 때도 있다. 주님은 2가지 상황을 병행해서 훈련시키니까, 훈련을 잘 받아서, 귀하게 쓰임 받자. 형통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곤고하다고, 낙심하지 말자.

2. 고향에서 육적 배경을 논하며, 배척받은 예수님(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은 안식일이면,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 모인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유대관습에 의하면, 회당은 열린 공간으로, 유대인들의 각종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 회당장의 허락만 있다면, 누구라도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여, 천국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이 놀랐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7:29). 확신이 있었고, 은혜로웠다(4:22). 배우지 않았지만, 모두 알았다. 결코 막힘이 없었고, 독특했다(7:46).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깊은 진리를 가르쳤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권위 있고 은혜로운 말씀을, 쉽게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믿지도 않고, 배척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랄 뿐, 예수님을 무시하듯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했다.

이 사람이라며, 예수님을 얕잡아 불렀고,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했다. “이런 것,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을 말하는데, 지혜는 무한하고, 권능도 무한하다. 자연을 다스리며, 풍랑을 잔잔하게 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바다 위로 걸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였다. 영을 다스리며, 더러운 귀신들을 모두 다 내쫓았다. 육을 다스리며, 모든 질병을 고쳤다. 죽음을 다스리며, 죽은 자들을 살렸다. 이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은 인정했지만, 어울리지 않는 지혜와 권능을, 어디에서 얻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려고, 했기에 물었다. 이 사실을 통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지혜와 능력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영접함이다.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의 직업과 가족을 들먹이며, 비하시켰다.

원문에는, 예수님의 직업을 먼저 언급했다.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그런 뒤에, 예수님의 가족을 거론했다.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예수님의 직업을 언급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다(13:55).

예수님은 요셉의 직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했다. 제사장도, 서기관도, 회당장도 아니었다. 목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들추어내는, 나사렛 사람들의 의도는, 예수님이 메시아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족관계를 거론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미 요셉은 죽고 난 뒤였기에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요셉이 죽은 뒤라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나사렛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이라 했다.

은연중에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연이어 예수님의 형제들을, 밝히고 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나중에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다. 나머지 두 사람, 요셉과 시몬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누이들을 언급했다.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아마 예수님의 누이들은 결혼해서, 나사렛에 머물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과, 가족관계를 언급했나? (3)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해, 일부러 예수님의 직업과, 가족들을 들추어내었다. 예수님의 직업과 가족들이, 예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이 땅의 지식이 아니라, 하늘로서 오는 지혜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작정했기에, 아무 관련도 없는 사실들을, 괜히 들추어냈던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니까, 쓸데없이 이것저것 핑계를 댈 뿐이다. 그러나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르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 한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원하니까,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욱 달게 여겨진다. 그 결과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하게 된다. 마음을 활짝 열어서, 받은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서, 살기를 바란다.

3. 고향 사람들의 배척으로, 능력을 행하지 않은 예수님(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었는데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자신을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당시에, 보편화된 속담으로 추측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데, 존경을 받지 못한다.

시기와 질투, 편견으로 인해, 선지자를 존경하지 않고, 오히려 비하시켜 버리기 일쑤였다.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무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다(3:21). 예수님의 형제들도 믿지 않았다(7:5). 당시 나사렛 사람들 전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 때는 단 한 사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 믿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더욱 환영하고, 따뜻하게 대접해야 할 고향 사람들이, 타향 사람들보다, 더 배척하고, 믿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서양 속담에 친밀함은 경멸함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즉 가까워질수록, 더욱 예의와 존경심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가깝게 지내면,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이미 고정해 놓은, 고정관념으로 본다.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본다.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따라서 예수님은 나사렛에 살면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로, 보잘 것 없는, 집안으로만 알았다. 그 결과 예수님의 지혜와, 행하는 권능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는 거부했다.

따라서 선지자의 고향처럼 되지 말자. 그러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 말씀을 들어도, 결실하지 못한다.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자. 어린아이처럼 늘 나를 낮추자. 그러면 예수님이, 나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줄 것이다. 고정 관념을 깨야,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고향 나사렛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권능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인가? 그러면 예수님의 권능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5)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예수님의 권능은 영원하며, 무한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곳에서도, 의도적으로 소수의 병자들은 고쳐주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13:58).

즉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아니했고, 그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아니했다(7:6).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는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니, 더 이상 그들에게, 권능을 행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마음이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겼다. “이상히 여기다”(우마조)놀라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에는 놀라다라는 동사가, 49번 사용되었다.

항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놀랐다. 그런데 예수님이, 놀라는 경우도 2번 있다. 한번은 본문에 있는,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시고 놀라셨다. 또 한 번은 (8:10)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에게 있는, 큰 믿음을 보고 놀랐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놀라게 하였다. 반면에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놀라게 해드렸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칭찬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대로, 권능을 행해서,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행하지 않았다. 나사렛을 떠나, 다시는 그 곳을 찾지 않았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처럼, 되겠는가? 아니면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되겠는가? 선택은 우리가 한다. 믿지 않으면, 예수님은 떠난다. 그 결과 예수님의 권능을, 볼 수 없다. 응답도, 복도 받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믿으면, 주님의 권능을 본다. 응답 받고, 복도 누린다. (9:17-18)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며 원망했다. 그때 (20)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22)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이 (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여기서 내가 믿나이다.” 먼저 결단했다.

그리고 후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간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자.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늘 복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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