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9년 1월 6일 -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막5:21-3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9-01-06 |
첨부파일: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hwp(22K) |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막5:21-34)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다(엡2:4).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긍휼이 풍성하다. 본문은 예수님의 풍성한 긍휼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갈릴리 바다의 거센 풍랑을, 잔잔하게 했다. 귀신들을 내쫓고, 모든 병을 고쳐주고, 죽은 자들도 살렸다. 능력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임을 밝혔다.
그런데 만일 능력만으로 하나님임을 보이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더 쉬운 방법들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갈릴리바다 근처에 있는 산을, 바다에 옮겨서, 가라앉히고, 하늘에서 금이 떨어지게 하거나,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말씀으로 소나 양을 창조해 보이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신들을 내쫓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살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과 함께, 풍성한 긍휼을 나타내려 함이었다. 예수님의 풍성한 긍휼을 깨닫고,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은 인간을 만나주었다(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떠났다.
그리고 바다 맞은편인,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서, 그 곳에서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다시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자, 피하지 않고, 만나주었다.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 밀던 자들이다(3:9). 예수님에게 식사할 시간도, 주지 않았던 자들이다(3:20). 그들은 예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아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고, 기꺼이 만나주었다. 그 때 모여든 큰 무리 가운데, 본문은 두 사람을 특별히 소개한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 사람은 남자였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여자였다. 남자의 이름은 ‘야이로’이고, 여자는 무명이었다.
야이로에게는 병들어 죽어 가는, 열두 살 된 딸이 있었었다. 반면에 여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왔다. 야이로는 부자였지만, 여자는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가난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기에, 회당의 제반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혈루증을 앓았기에, 회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야이로는 높은 위치에서 존경받았으나, 여자는 낮은 위치에서, 수치를 당해야 했다. 야이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지만, 여자는 몰래 예수님의 뒤로 왔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기 딸 위에, 손을 얹어주기를 바랐지만,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자기 손을 대기 원했다.
이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조금도 구별하지 않고, 두 사람을 똑같이 만나주었다. 그들을 똑같이 대하면서, 똑같이 긍휼을 베풀어주었다. 베레아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막10:13-).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며 축복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어른이든지 아이이든지, 지위가 높든지 지위가 낮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이, 누구라도 다 만나준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도, 기꺼이 만나준다. 참으로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다.
2. 예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준다(22~23).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당시 유대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몹시 미워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기에, 그들의 입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큰 무리 가운데서 기다렸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야이로는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곳으로 왔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며, 그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음은, 참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기에,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나왔다. 예수님의 발아래 공손하게 엎드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간곡하게 구했다. 그 때 야이로의 딸은, 열두 살이었다(눅8:42). 그 당시 여자들은, 열두 살에 결혼했다. 그러니까 곧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될 때였다.
꽃을 피워야 할 때에, 야이로의 딸은 병들어 죽게 되었다. 더군다나 야이로의 외동딸,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그러니까 야이로가, 얼마나 사랑했겠는가? 시집을 갈 만큼, 다 자란 딸이었지만, 야이로는 그를 “내 어린 딸”이라고 불렀다. 야이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예수님께 간구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그의 집에 와서, 병들어 죽어가는, 그의 딸 위에, 손을 얹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의 딸이 병에서 구원을 받아, 살아나리라고 믿었다.
‘야이로’(그가 그를 깨우칠 것이다, 그가 그를 비추실 것이다). ‘오르’(빛나다, 비추다, 밝게 하다)이다. 그의 어려움을 통하여, 빛나는 믿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었다. 위기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임을 기억하자.
물론 야이로의 믿음이나 동기가, 전적으로 순수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 뒤를 따르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나아오지 않았다. 병들어 죽어 가는, 딸을 한번 살려보겠다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들어주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와, 간곡하게 아뢰면, 긍휼히 여기고, 간구를 들어준다.
큰 무리가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쉰리보) 쉰(함께) + 들리보(괴롭히다, 에워싸다, 꽉 죄다). 이들의 모습은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모습이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한다(25~26).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 이는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짐으로써, 자기들의 병을 고치고자 함이었다(3:10). 그들 가운데 있던, 한 여자를 특별히 소개한다. 그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 혈루증은, 하혈하는 증세를 일컫는다.
본문은 그의 상황을, 5가지로 설명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왔다. 어쩌면 자궁에 종양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해왔으니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을 것이다. 육체적 고통보다도, 정신적 고통이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혈루증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레15:19-). 그의 몸에 닿았으면, 모든 것들이, 부정하게 간주되었다. 따라서 성전이나 회당에, 들어갈 수 없으니, 사회생활도, 가정생활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접촉하는 모든 것들이, 다 부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②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의사마다 처방하는 방법이 달랐다. 병이 중한만큼, 먹는 약도 독하고, 지켜야 하는 사항들도, 까다롭기에, 그 모든 것이 괴로움이었다.
③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다. 병을 고치려고,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가진 재산이 다 날아가, 이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병들어도 돈으로, 사람들을 쓰고, 사먹으면 되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④ 아무 효험도 없었다. 많은 돈을 써도, 효험만 있다면 괜찮은데, 이러한 일들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괴로움만 더해주었다. 그의 병은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⑤ 병은 도리어 더 중해졌다. 그 동안 받은, 괴로움이 많았다. 재산도 다 갖다 바쳤다. 그런데도 그의 병이 낫기는커녕, 더 심해졌으니, 얼마나 절망적이었겠는가?
(27-29)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 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비록 그의 상태가, 절망적이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병을, 모두 다 고친다는 소문을, 그녀는 들었다. 돈이 없어도, 복된 믿음을 가지려면, 귀가 복되어야 한다. 좋은 소식을 들어야 믿음의 사람이 된다. 나쁜 소식만 들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예수님뿐이었다. 그래서 무리 가운데 끼어서, 예수님에게 다가왔다. 그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예수님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예수님 뒤로 와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자신에게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것이다. “대다”(합토마이)는 ‘소속하다, 관계되다.)로 (합토)에서 파생되었다. ’합토‘(고착시키다, 불을 붙이다)는 말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 그의 병이 순간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나은 것이다.
그는 자기 몸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확연하게 느끼고서, 이제는 자기가 완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야이로의 믿음이, 다소 이기적이었다면, 여자의 믿음은, 다소 미신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탓하지 않고,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이기에, 그의 믿음에 그대로 응답했다.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여자가 병 나음을 받는 순간, 예수님은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알았다. 예수님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만나주고, 개별적으로 간구를 들어준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능력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다. 예수님은 우리들 각자와, 개별적으로 교통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의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다.
그 날 예수님을 에워싼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이 나간 줄을 알았다. 그래서 뒤로 돌이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다. 물론 예수님이 몰라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여자에게 믿음을 더해주고자 말씀했다.
(31-33)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르기에, 이런 질문을 한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았다. 예수님은 누가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여자는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님에게 왔다.
왜 그가 두려워하여 떨었나? 그가 혈루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무리 가운데 끼어 있었음이 알려졌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었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 거룩한 떨림이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의, 거센 풍랑을 잔잔하게 했을 때,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쳤을 때, 거라사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 여자도 예수님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서, 두려워하여 떨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 앞에, 두려워하여 떨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분명하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유대인들은 아무에게도, 엎드리지를 않았다.
그들에게는 왕이 없어서, 하나님께만 엎드렸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바르게 알아보았던 것이다. 모든 사실을 예수님께 여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눅8:47).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공적으로 고백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자는 병에서 놓임 받았다. 예수님은 조용히 그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을 더하여주기 위해, 일부러 개별적으로 만나주었다. 예수님은 네 가지 말씀으로, 믿음을 더하여주었다.
① 예수님은 그를 “딸”이라고 불렀다. 그 여자의 나이가 어리기에, 예수님이 그를 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딸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를 “딸”이라고 부름으로,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②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의 능력을 행했다.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믿음이 있어서, 귀신들을 내쫓아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은 다르다,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구원을 허락했다.
야이로의 믿음은 이기적이었고, 이 여자의 믿음은 미신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주고,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며, 그들에게 믿음을 더하여주었다. 이제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부활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갔을 때, 그 곳에는 오백여 형제가 함께 모였다(고전15:6). 그 자리에 야이로도, 혈루증에서 나음을 받은 여자도, 있었을 것이다.
③ “평안히 가라”고 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신체적 건강을 허락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의 사회생활과, 그의 신앙생활도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선포했다. 이제 자신의 가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웃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도 있고, 회당에 들어가서,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평안, 이웃과의 평안, 자신과의 평안을, 누리게 된 것이다.
④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했다. 열두 해 동안 앓아 왔던 혈루증에서, 놓임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혈루증으로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풍성한 긍휼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준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준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준다.
병에 걸렸는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는가? 걱정되는 일이 있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가?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감당하지 못할 짐은, 아주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다. 예수님에게 나오면, 우리를 개별적으로 만나준다.
예수님에게 아뢰면, 예수님은 우리의 간구를, 개별적으로 들어준다. 아울러 우리 믿음이, 비록 겨자씨 한 알처럼 보잘것없어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을 더하여준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풍성한 긍휼을 입기 바란다. 그래서 고통의 멍에를 다 벗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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