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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년 12월 30일 - 항상 웃는 교회(창21:1-7)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8-12-30
  첨부파일:   항상 웃는 교회.hwp(21K)

항상 웃는 교회(21:1-7)

 

사람은 연약하기에, 어려움을 당한다. 병을 앓고, 사고를 당한다. 실패하고 갈등한다. 죽음의 위기를 당하면 자기한계를 느끼고 좌절한다. 어려운 일을 당해, 자기한계를 느끼면, 꿈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상황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버텨,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한다. 한계상황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을 만났을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희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에 있다.

성경은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소개한다. 아브라함은 99, 사라가 90세에, 자기한계를 맞았다. 99세의 아브라함은, 죽은 몸과 같았다. 남자로서 더 이상,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사라도 생리가 끝나,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아들을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24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적인 소망이 끊어졌을 때, 죽은 자와 같았던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했다.

이들 부부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이적을 베풀어주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은 이적을 행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아있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2019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 항상 웃는 교회이다. 하나님으로 항상 웃기 바란다.

1. 인간은 언제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는가?

(1) 나이가 들면,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무서운 것이 없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다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이 젊음의 패기며, 확신이다.

그런데 나아가 들면 들수록, 이러한 용기가 사라진다. 자꾸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 아브라함이 자기한계를 느끼는, 99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17:1), 아들을 주겠다고 하니, 아브라함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여기서 웃다’(짜하크)인데, ‘소리 내어서 웃었다는 말이다.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고 있지 않는가?

더 이상 취업도 불가능하고, 이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가? 그러나 낙심하거나, 포기할 때가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했다. 이적을 주겠다는 말씀이 있으니, 절망할 필요가 없다.

(2) 육체가 쇠약해져갈 때,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젊어도 육체가 약해지면, 낙망하게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육체가 쇠약해졌다. (18:11-12)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사라가 육체의 한계를 맞았다. 생리가 끊어지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남자들도 나이가 들면, 육체의 한계가 찾아온다. 동작이 둔하고 몸이 쇠약해지기에, 몸에 좋은 식품과 보약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3) 꿈이 성취될 가능성이 희박해질 때,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인간은 꿈 때문에 살아간다. 꿈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꿈이 좌절되면, 인간은 좌절한다. 99세가 되어, 꿈이 성취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님이 나타나, 꿈을 회복시켜 주었다.

아들을 주고, 심히 번성하게 된다는, 아름다운 꿈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했다. 어찌 아들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꿈을 포기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 인생을 살다보면, 되는 때도 있고, 안 되는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하나님이 포기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2. 한계를 느끼고 절망할 때, 찾아오는 하나님을 신뢰하라(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한계를 느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자신은 전능한 하나님이며, 믿음으로 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86세에 낳았고(16:16). 99세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났다(17:1). 13년의 공백은, 하나님의 약속과 때,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을 믿지 않고, 자신의 방법으로, 아들을 만들었을 때에는 침묵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았을 때는 침묵했다. 하나님의 침묵도 하나님의 음성이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방법으로, 아들을 낳았음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함으로, 육적인 방법을 쓰자, 기뻐하지 않았음을 말씀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육신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침묵한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육신의 방법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침묵한다. 하나님의 때를, 육신의 방법으로, 단축하려고 할 때는 침묵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브라함의 몸은 이제,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어졌다. 사라도 생리가 끊어져, 임신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알렸다. 전능한 분이니까, 신뢰하라는 말이다.

(1)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한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은 전능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 (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불가능에 부딪힐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2)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라.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말씀을 준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존재한다. 약속이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래서 구약, 신약이다. 신앙과 신념은 전혀 다르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신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신념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리라고 약속했다(12:7). 땅의 티끌만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13:16). 하늘의 뭇별같이, 자손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15:5).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15:6).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

(3) 아브라함 부부는, 하나님은 때를 기다린다. “늙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노경”(21:7), 즉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을 알고,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되어도, 결국엔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들로 하여금, 웃게 하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죄에 빠져, 죽은 인생이었다.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인간의 웃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음으로, 인간이 잃어버린 웃음을 다시, 주님 안에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웃음을 되찾아야 한다.

(4)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은, 약속을 꼭 지킨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기도응답을, 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특별한 사람만, 응답을 받는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다.

반드시 약속을 이루는 분이다. 사람들은 약속하고도, 자기의 이익을 따라 파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한 대로, 그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한다. 라틴어에 나는 믿는다.”‘credo’이다. credocordo의 합성어다.

‘cor’는 심장, 마음, 심령을 뜻하고, ‘do’는 고정시킨다, 놓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고정시킴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신앙훈련을 통해,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켰다.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난다. 말씀이 능력이다. 예수님도 사단을 물리칠 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하나님은 약속한 말씀대로 행했다. 아들을 주셨다. 어떻게 이적이 나타났다.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3.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만든다(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웃으면서, 100세 된 자가 어찌, 자식을 낳겠느냐고 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은, 절망하기도 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또 마음이 조급하여, 기다리다 못해,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 만에 첩을 얻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한 대로, 언약을 성취시켜 주었다.

하나님은 말씀한 바를, 반드시 성취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은 절망 끝에, 웃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준 아들의 이름이 이삭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웃음)을 주었다(3). 사라의 웃음은, 인생 역전의 웃음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고통 중에 울었다. 자신을 멸시하는, 하갈 때문에 울었다. 그런데 이제 사라 자신이 아들을 낳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이 역전되었다.

사라는 기쁨이 충만했다. 사라의 웃음은, 절망 중의 웃음이다. 절망의 순간,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삭을 주었다. 그래서 이삭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은 웃게 하는 분이다. (6)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웃은 이야기는, 사라의 이야기만 아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염시켰다. 하나님의 기쁨은, 사라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누구든지, 이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라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웃음이 넘치는 교회, 웃음을 주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웃음이 넘치는 성도들로, 가득해야 한다. 웃음을 잃어버렸다는 생각과 느낌이 든다면, 빨리 웃음을 되찾도록,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웃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웃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웃음을 잃은 사람은 불행하다. 웃음이 있는 가정은 행복하나, 아무리 돈이 많고, 큰집에 살아도, 웃음이 없다고 하면, 결코 행복한 가정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기쁨의 근원, 기쁨의 전달자가 되기 바란다.

진정한 웃음은, 또 다른 사람을 웃게 한다. 주님은 우리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기쁨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웃음의 전달자로, 살기 원한다. 아브라함은 웃음의 조상이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웃었다(17:17).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기막히고 행복해서, 엎드려 웃었다.

우리의 믿음은, 웃음 넘치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웃음은 사람마다 다르다. 요리사는 어떻게 웃을까? ‘cook cook cook’이라고 웃고, 축구선수의 웃음은 ‘kick kick kick’이다. 살인마의 웃음은 ‘kill kill kill’, 남자 바람둥이는 ‘her her her’, 여자 바람둥이의 웃음은 ‘he he he’라고 한다.

애인 앞에서의 웃음은, 너무 좋아 好 好 好웃는다. 하나님으로 웃는 사람은 하하하이다. 어쨌든 주님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표어는, 항상 웃는 교회이다. 교회에서 항상 웃자. 가정에서 항상 웃자. 찡그리거나, 화를 내면 벌금이, 항상 웃자.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웃게 만든다. 모두 다 끝났다고, 자리를 뜨는 순간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믿고 나아가, 역전승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역전의 명수가 될 수 있다. 이 믿음으로, 항상 웃는 교회를 만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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