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12월 9일 - 귀신 들린 자를 고친 예수님(막5:14-20)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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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자를 고친 예수님(막5:14-20)
지난주일 말씀은, 예수님은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영을 말한다. 귀신들린 자는, 7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① 무덤 사이에 거처했다. ② 통제 불능상태였다. ③ 밤과 낮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④ 불안정해서 끊임없이, 무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⑤ 늘 소리를 질렀다. ⑥ 돌로 자기의 몸을 해쳤다. ⑦ 전혀 수치를 느끼지 못했다. 귀신의 본질이 더럽기에, 언제나 더럽고도, 악한 짓만 행한다. 더럽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반대하는 ‘영’이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 ①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②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연결됨이 신앙인데, 끊어졌음을 알았다. ③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있었다.
귀신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으나, 최종 완성과 마지막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귀신은, 돼지 떼에게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간구했다.
예수님이 허락하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에게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려, 전부 바다로 뛰어들어, 거의 이천 마리가,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을 통해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확실히 나갔음을 알 수 있고, 아주 악하고, 파괴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은, 악한 군대 귀신들이 그에게서 나가자, 정신이 온전하여 졌다. 뿐만 아니라 그 때로부터,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행한 큰일을 널리 전했다. 따라서 우리도 새롭게 되는 은혜를 입어, 예수님이 행한, 크고 놀라운 일들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1. 귀신 들렸던 사람의 변화된 삶(14-15).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돼지를 치던 자들은, 너무나도 놀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돼지들이, 바다에 빠져서, 돼지들이 전부 다 죽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죽은 돼지들이,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그 많은 돼지들을 건져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얼른, 마을로 달려갔다.
도망가서 그 충격적인 일을, 읍내 사람들과, 성 밖에 있는,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위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이르렀을 때,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알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정신이 온전해졌다. 완전히 정상인이 되었다. ①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예수님 곁에 앉아 있었다. ② 아무도 제어할 힘이 없었던 자인데, 예수님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③ 구분할 수 있었다. ④ 왔다 갔다 하지 않았다. 제 정신이 아니던 자가, 정신이 온전해졌다.
⑤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⑥ 더 이상 자기의 몸을 해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다. ⑦ 부끄러움을 알기에, 옷을 입지 않았던 자가, 옷을 입었다. 어떻게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였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들의 가족과 이웃은, 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들이 귀신들린 자에게 한 일은, 고작해야 쇠고랑과 사슬로, 그를 묶어둘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쇠고랑이나 쇠사슬로, 채우지 않았다. 단지 말씀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쫓아냈다.
예수님만이, 귀신들린 자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예수님만 우리 인생의, 진정한 도움이 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세상적인 수단을 간구하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예수님으로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보였는가?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감사하지도 않고, 두려워했다. 물론 그들이 귀신들렸던 자를, 두려워할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그들이, 두려워했던 대상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경외심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보면서, 거라사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공포심이다. 예수님의 신성이, 그들을 몹시도 두렵게 만들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만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2. 예수님의 권능을 본, 그 지방 사람들의 반응(16-17).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돼지 치던 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던 자에게 행한 일과, 돼지들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목격하고, 거라사 지방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소상히 일러주었다. 이 때 거라사인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는가? 예수님에게 무릎 꿇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우리도 구원하여 주세요. 우리와 함께, 마을로 들어가서, 악한 영들을 쫓아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의 반응은, 너무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오히려 그 지방에서 떠나주기를 간구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마을에서 떠나기를 원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스스로 복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예수님 때문에, 돼지들이 다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으로 인해, 복의 근원인 주님을 배척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의 축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물질적인 욕심을 버려야,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 세상적인 욕심은, 진정한 복을, 스스로 저버리게 만든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돼지 앞에 놓인 진주’와 같았다(마7:6).
진정으로 불쌍한 것은, 죽어서 물 위에 떠 있는, 돼지들이 아니다. 만복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배척한 거라사인들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복 받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눈에서, 세상의 것을 걷어내고,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을 향한 이기적인 욕심을, 씻어내야 한다.
그래야 만복의 근원되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보고, 영접할 수 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씻어내고,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 복의 근원되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마음에 영접함으로, 항상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놀라운 이적을 보면, 저절로 믿음이, 생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3년 동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들을, 무수하게 보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했다. 거라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떠나가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으로, 군대 귀신들을 모두 다 내쫓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영혼을 다 구원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확실한 이적인가? 그런데도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지방에서, 떠나기를 바랐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허용한 것에서, 하나님이 한 영혼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알게 된다. 이천 마리의 돼지들보다, 귀신들린 한 사람의 회복이, 더욱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긴다(막8:36-37).
이것은 황금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의 가치관과, 너무나 다르다. 나에게 이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당신이 있으면, 재물이 손해가 생길 수 있을지 모르니, 제발 떠나주세요.” 혹시 이런, 간청을 드리지 않을까?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나요?
큰 돌멩이 아래에 숨어사는, 벌레들이 있다. 바퀴벌레와 같은 것들이다. 돌멩이를 들치면, 벌레들은 구멍으로, 쏜살같이 기어 들어간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이방 사람 거라사 사람들도, 빛이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다.
(18-19)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들이 간구한 대로, 예수님은 배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예수님은 다시, 거라사인의 지방을 찾지 아니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배에 오를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분명히 그는,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혹시 귀신에게 다시 억압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뒤따르기를 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아니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관계전도를 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장소가, 곧 선교 현장이기 때문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자유를 얻었다는 소식을,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긴 것과, 그에게 행한 큰일을, 그의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 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만일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그 곳을 떠나면, 그 곳에는 예수님의 증인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 들렸던 사람의 간구를, 허락하지 아니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보내셨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증인을 남겼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였다.
물론 귀신 들렸던 사람이,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신앙의 경륜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증인으로 보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즉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가까운 곳에서, 전도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3. 귀신들렸던 자가 예수님을 증언함(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귀신 들렸던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① 갔다. ② 예수님의 큰일 행함을 전파했다.
“주여, 나를 보내지 마소서. 사람들은 내가, 군대 귀신 들렸던 것을 다 아나이다. 그래서 내가 가까이 가면, 그들은 다 나를 피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믿음에는 변명이 아니라, 언제나 순종이 따른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먼저 자기 가족에게 가서, 예수님이 그에게 행한 큰일을 알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데가볼리에도 전파했다. 데가볼리는 “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물론 전부 이방인들이 사는, 도시들이었다. 거라사도 데가볼리에 속해 있다. 귀신들렸던 자는, 데가볼리의 여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이 그에게 행한 큰일을 전파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나? (막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또 (막8:1上)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이곳에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예수님이 7병2어를 일으킨, 이방인의 땅이었다.
예수님은 그 곳에 가지 않았는데, 데가볼리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다. 과연 그들은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았겠는가? 바로 귀신들렸던 사람을 통해서였다. 데가볼리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그는 예수님을 전파했다. 그 결과 데가볼리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그는,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데가볼리 사람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을 해치던 사람이, 남을 살리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다. 그러니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을 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증인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귀하게 쓴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면, 하나님이 자라나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하나님은 내게 풍성한 추수의 기쁨을 안겨준다. 받은 은혜에 대한, 최고의 감사 표시는, 바로 복음 증언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전해도, 식구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가서 전도하는 내 사역이, 제한되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이 완전히 복음화 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가정은 가정 먼저,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할 장소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대로 말하면 된다. 주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셨으면, 자유를 주셨다고 말하라. 내 마음에 평화를 주셨다면, 역시 평화를 주셨다고, 그대로 말하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요, 치료자요, 소망이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잘 아는 자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내가 체험한 주님의 은혜와 역사를 주변에 널리 전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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