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12월 2일 - 귀신들을 쫓아내는 예수님(막5:1-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12-02 |
첨부파일: 귀신들을 쫓아내는 예수님.hwp(21K) |
귀신들을 쫓아내는 예수님(막5:1-13)
오늘 본문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에게 들린 귀신은,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많은 귀신이 들렸다. 그 결과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어서,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한 짓을 일삼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고, 그에게서 더러운 귀신들을, 다 내쫓았다.
그 결과 정신이 온전하여 졌다. 뿐만 아니라 그 때로부터,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그에게 행한 큰일을 널리 전파했다. 우리에게도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한, 크고 놀라운 일들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바란다.
1.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1~2).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예수님과 일행이 탄 배들은, 해가 질 무렵, 가버나움을 떠났다.
바다 건너편으로 가던 도중에, 그들은 큰 풍랑을 만났다. 따라서 그들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게 된 때는, 다음날, 동틀 무렵이었을 것이다. 거라사 지방은, 베레아 지방의 수도였으며, 주로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 돼지들이 사육되고 있었다.
제자들이 이방 땅에서, 다소간의 쉬기를 원했지만, 그 곳에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로 예정된,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그 근처에 있는, 무덤 사이에서 나왔다. ‘더러운 귀신’은, 원문에는 ‘더러운 영 안에 있는’이라는 말이다.
귀신의 본질이, 더럽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귀신들은, 언제나 더럽고도 악한 짓만 행한다. 더럽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반대하는 ‘영’을 말한다.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3~5)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① 그는 무덤 사이에 거처했다. 그는 거라사에 살던 사람이다(눅8:27). 그러나 더러운 귀신들에게 사로 잡혀서, 도시에 살지 못하고, 더럽고도 부정한 장소인, 공동묘지에 거주했다. 무덤의 이미지는 ‘죽음과 멸망’이고, 예수님의 이미지는 ‘생명과 구원’이다.
② 그는 통제 불능이었다. 아무도 제어할 힘이 없었다. 사람들이 여러 번, 그의 발에 고랑, 즉 차꼬를 채웠고, 그의 손이나 몸에는 쇠사슬로 매었다. 그러나 귀신들의 영향으로, 그의 몸에서는 엄청난 힘이 분출되어, 초인적인 힘이 나타났다. 그는 매번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너무도, 위험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9中)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이처럼 군대와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누가 그를 제어할 수 있겠는가? 능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옳게 사용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③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 있었다. 밤과 낮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귀신들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잠을 잔다거나 쉬는 일이 전혀 없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들은, 밤낮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며 못살게 굴었다.
④ 그는 불안정했다. 끊임없이 무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산을 들락날락했다. 또한 그는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가기도 했다(눅8:29). 그는 잠시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귀신은 가상적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영적 존재다.
⑤ 그는 늘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일상적인 말이 아니었다. 광기에 가득 찬 더러운 귀신들이, 그의 발성기관을 이용해서 내는, 소리였다. 따라서 그 소리는 분명히 듣기에, 오싹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⑥ 그는 돌로, 자기의 몸을 해쳤다.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다(마8:28)고 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를 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쳤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해치는 것은, 악령의 역사다.
⑦ 그는 전혀, 수치를 느끼지 못했다. (눅8:27中)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나, 벌거벗고 다녔다. 그렇지만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귀신 들린 사람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마귀는 살인자다(요8:44).
(계9: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파괴자라는 뜻이니, 마귀의 사자인 귀신들도 역시 살인자요, 파괴자일 수밖에 없다. 악령은 그냥 들어오지 않는다. 먼저 생각을 집어넣고, 생각에 집착될 때, 자리를 잡는다.
악령은 악한 마음을, 회개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 들어온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엡4:26).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마음을 짓누르면, 벌써 악령에게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임을 기억하라.
2. 귀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권세는 무엇인가?(6~7).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귀신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해칠 목적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굴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예수님은, 인간의 능력과 존재를 뛰어넘는, 신적 존재임이 분명히 보여준다.
후에 귀신이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시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귀신들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을 섬기던 천사들이었기에, 예수님께 절했다. 두려워서 크게 부르짖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귀신들을 하늘에서 내쫓은 분도 예수님이고, 장차 영원한 불 못에 던질 분도,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귀신들은, 귀신 들린 사람의 입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정체와 권세를 말했다.
①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천국에서, 예수님을 예배하며 섬기던 천사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약2:19中)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했다.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기에, 두려워함은, 당연한 일이다.
장차 예수님이, 귀신들은 결박해서, 영원한 불 못으로 던질 것을, 알고 있었다. (눅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예수님이 그들을 언제라도, 무저갱으로 던져질 수 있음도, 알고 있었다. 무저갱은 귀신들을 가두어두는 곳이다. 그 곳은 말 그대로, 밑바닥이 아주 없는 구렁텅이다.
그래서 그 곳에 빠지면, 계속해서 밑으로 떨어져야만 한다. 귀신들은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진다.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안다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께 말했다.
②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서로의 관계가 상관이다. 서로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연결을 말한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모습이면, 그것은 비극이다. 귀신들은 마지막에는, 그들이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질 것임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 (마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아직은 초림의 때이지, 재림의 때는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연결하라. 그것이 신앙이다.
③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귀신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예수님이 그들을 괴롭히러, 왔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기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만큼 그들은 절망적이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권세를, 지닌 분임을 알고 있었다.
귀신들도 종말론적 심판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권세의 종말이, 임할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나, 최종 완성과 마지막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마태의 종말론의 관점과 일치한다.
3.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권세(8-9).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다스리기에, 모든 병을 고쳤다. 자연을 다스리기에,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했다. 또한 영의 세계를 다스리기에, 귀신들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에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자기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물어보자, 자기의 이름이 군대라고 했다. 그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군대”는, 로마시대 7,2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뜻하는 용어이다. 더러운 귀신들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에게, 나누어 들어갔다. 따라서 이천은 넘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 귀신의 이름을 일부러 물어보았나? 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귀신들의 수가 많더라도, 예수님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0-12)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주님은 이미 귀신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올 것을 명했다.
따라서 귀신들은, 그들의 창조주이며, 심판주인, 예수님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즉시, 그 사람에게서 나와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저갱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악하고 더러운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지방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지방은 이방 땅이어서, 그들이 활동하기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마침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다.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간구했다.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은 허락했다. 이때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더러운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없었고, 또한 돼지들에게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진실로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이다. 예수님은 영의 세계도, 온전히 다스린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의 제안을 허락했을까? 예수님은 그 즉시, 그들을 무저갱으로 보내버리면, 귀신들의 수가, 그만큼 줄어들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선과 악이 우리 속에서 서로 싸우듯이, 하나님과 사탄도 서로 싸우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사탄이 하나님을 이기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언제나 절대주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단지 하나님은, 그의 뜻 가운데, 사탄과 그의 사자들인, 귀신들을 사용할 따름이다. 그래서 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사탄과 귀신들이, 계속 활동하도록 허락한다. (욥1-2장)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했다. (눅22:31-32)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베드로를 키질하게 했다.
(고후12:7)을 보면, 바울에게 있던 가시도, 사탄의 사자, 곧 귀신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그에게 준 것이었다. 이와 같이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때로는 더 큰 믿음을 주기 위해, 때로는 더 큰 은혜를 주기 위해, 하나님은 사탄과 귀신들을 이용한다.
마찬가지로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귀신들의 제안을 허락했다.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의 이천 마리가,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렸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 있었던, 기괴한 현상들이, 귀신 들린 돼지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왔다. 귀신 들린 돼지들은,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한 마리도 남김없이, 다 죽고 말았다. 돼지들은 어느 정도 헤엄을 친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모조리 바다에서 몰사한 것은, 귀신들이 그것들을 전부 죽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선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확실히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귀신들이, 아주 악하고 파괴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요일3:8中)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아울러 그 많은 귀신들을, 순식간에 내쫓은 예수님의 권세도 알 수 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을 모두 내쫓고,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뒤에, 악한 영들이 활동하고 있다. 악한 영들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영들을, 쫓아내려고 오셨다. 따라서 예수님께 악한 영들의 활동을 기도로 아뢰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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