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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년 11월 25일 - 풍랑을 잔잔하게 한 예수님(막4:35-41)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8-11-25
  첨부파일:   풍랑을 잔잔하게 한 예수님.hwp(22K)

풍랑을 잔잔하게 한 예수님(4:35-41)

 

제자들은 큰 광풍으로, 심히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순종하고 잔잔해 졌다. 제자들은 이 일을 보고 두려워하며,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창조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예수님에게 순종했다. 갈릴리 바다의, 큰 풍랑을 잔잔하게 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풍랑도 잔잔하게 한다.

1. 풍랑 전의 고요함(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어느덧 낮이 다 지나가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다.

예수님은 지금, 가버나움에 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있다. (5:1)을 보면,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갔다. 갈릴리 바다 남동쪽이다. 왜 예수님은, 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했나? 가버나움에서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기를 원했나?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기 위함이었다. 사람이 붐비던 가버나움에 비해 거라사인의 지방은, 비교적 한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3:20), 몰려드는 무리로 인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조차도 없었다. 그 날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제자들이 쉬며, 기도하기 원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갔다. 예수님은 그 날, 하루 종일 배 안에, 주무실 정도로 바빴다.

제자들은 갈릴리바다의 어부였기에, 배를 몰고 가는 일에 능숙했고, 갈릴리 바다의 지리나 환경에도, 익숙했다. 갈릴리 바다에서, 아주 오래된 배 한 척이, 발굴되었다. 보존 상태가 꽤나 괜찮았다. 면밀히 조사해보니까, 그 배는 예수님 시대의 것이었다. 길이8m, 너비2m 조금 넘었다.

그 정도 크기라면, 십오 명 정도가, 함께 탈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날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탔다. 그런데 (4:10), 예수님 곁에는, 열두 제자만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36)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라.”라고 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열심을 말한다.

(8: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행선할 때에, 즉 돛을 달고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서, 배가 가도록 했다. 만일 역풍이 불거나, 물결이 거세었다면, 그들은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야 했다.

그만큼 그 날, 저물 때의 갈릴리 바다는 고요했다. 그래서 모두 순풍에 돛을 달고, 아무 걱정 없이, 바다 건너편을 향했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여기까지는 풍랑 전의 고요함이었다.

2. 풍랑 속의 고요함(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갈릴리 바다의 고요가, 갑작스런 풍랑에 의해 깨진다. 그 날 있었던 풍랑의 심각성은, 3가지로 설명된다.

큰 광풍이 일어났다. 갈릴리는 주변이,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였다. 때때로 북쪽에 있는, 높은 산에서 찬 공기로 이루어진 기류가 형성된다. 그 기류가 산과 산 사이, 좁은 계곡을 지나, 갈릴리 바다 쪽으로 불면,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게다가 갈릴리 바다는, 해면 210m. 아주 낮은 곳에 있다.

(8:23)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했다. 그 때 바람이, 아주 무서운 속도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사납게 불어 닥쳤다.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가, 갈릴리 바다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면, 서로 충돌을 일으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광풍은 미친 듯이 제멋대로 부는 바람이다. 이렇듯 갈릴리 바다는, 그 지형적인 이유로 인해서, 빈번하게 광풍이 일어난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광풍은, 흔히 일어나는, 광풍의 하나가 아니었다. ‘큰 광풍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정된, 특별한 광풍이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왔다. 고요한 바다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어난다. 바람이 셀수록, 물결은 더 크게 일어난다. 갈릴리 바다는 자그마하다. 해변을 때린 물결이 되돌아오면서, 해변으로 다가가는 물결과 충돌한다. 그러면 물결은 더 크고,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8:24) 그 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다고 했다. 배를 덮어버릴 만한, 큰 물결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물결이 해변으로 밀려가면서, 또한 해변에서 되돌아오면서, 배의 양쪽을 심하게 부딪쳤다.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들이 탄 배에는, 갑판이 따로 없었다. 속이 완전히 열린 배였기에, 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오자, 순식간에 배에 물이 가득찼다. 그래서 (8:23) 배가 가라앉을 만큼 위태하게 되었다.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 익숙했지만, 그 날 만큼은, 속수무책이었다.

배를 덮어버릴 만한 물이 들어오니까,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깨지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은 배를 타고, 관광이나 즐기던, 여행객이 아니었다. 상당수가 어부인데, 그들은 죽게 되었다고 여겼으니, 풍랑이 얼마나 심하고 위태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이 큰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 ‘고물은 배의 뒤쪽, 선미를 말한다.

예수님의 모습은, 풍랑 속에서의 고요였다. 거세게 부는 바람도, 높게 이는 물결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다. 배 안에 들어온 차가운 물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제자들의 부산한 움직임도, 예수님을 깨우지 못했다. 그러면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풍랑 속에서도, 고요할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갈릴리 바다의 큰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게 주무셨을까? 여기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수님의 인성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주무신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아무튼 예수님이 주무신 것은, 예수님이 육체를 가진, 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육체를 가졌기에, 그 동안 피로가, 분명히 많이 누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은, 배가 출발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질 만큼, 아주 고단했다.

예수님의 신성이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곧 큰 풍랑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주무셨다.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는 분이기에, 풍랑 속의 고요였다. 신성을 지닌 예수님을, 완전히 달랐다. 제자들은 풍랑을 이겨보려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써보았다. 그러나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8:25), 이 때 어떤 이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다. 오늘 본문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8:24)에서는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

너무도 다급한 나머지, 그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조차도, 제 각각이었다. 그럴지라도 그들이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청한 것은 바른 일이었다. 삶의 풍랑을 맞이할 때, 성도들이 하나님을 깨우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44: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났다면, 풍랑속의 예수님을 깨우라.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 예수님은 깨어서, 우리의 풍랑을, 고요로 바꾸어줄 것이다.

3. 풍랑 후의 고요함(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깨었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은 곧 일어났다. 제자들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을 돕기 위하여, 곧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다. 그런 후에 바람을 꾸짖으며, 바다더러 말씀했다.

바람과 바다를 동시에 꾸짖었다. 바람과 바다로 나누어서, 이중적으로 표현했다. 곧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바람에게는 잠잠할 것을 명했고, 바다에게는 고요할 것을 명했다. 이 말씀이 전부였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한 말씀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한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두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단 한번만, 이 말씀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바다는 창조주의 음성을 듣고, 즉시 순종했다. 바람이 그쳤다. 그 날의 바람은, 큰 광풍이었다. 수백 만 마력의 힘을 가진, 바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은, 곧 그치면서 잠잠해졌다. 바람이 그쳐도 큰 물결이 사라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배를 덮을 만큼, 아주 컸던 물결들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26: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89:9)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이와 같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바람과 바다를 다스린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들을 잠잠하게 하며, 고요하게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의 권세로 이 일을 행했다. 그러니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다. 그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계속 드러냈다. 예수님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2:10).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다(2:28). 사탄보다도 더 강하다(3:27).

말씀과 이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계속 드러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하게 함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이,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하게 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보다, 큰 권세가 있다. 이것을 모른다면, 진정한 믿음도 아니고, 또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길 수 없다.

주님은 우리가 믿고, 맡기기를 원한다. 기도는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맡겨야 할 것들이 있다. 나의 명예, 학벌, 재산, 가족, 건강을 맡겨야 한다. 또한 인생에서 닥치는, 이상한 일들은 의미가 있다. 이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 의미를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의미는 내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풍랑에는 하나님이 의미를 준다. 이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의미를 맡기는 사람만이, 문제를 주님께 아뢸 수 있다. 자기자리를 지킬 수 있다. 믿음은 관계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해도, 열매 맺는다. 위치와 자리가, 운명을 결정한다. 풍랑은 위기다. 자기 힘으로 안 될 상황이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면, 삶의 위기, 풍랑의 위기에 너무 연연해 말라. 굳건히 주님께 사정을 아뢰는, 기도의 자리를 지키면, 풍랑은 사라진다. 문제가 없으면, 기적도 없다. 풍랑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지체되지 않는다. 풍랑으로 인해서, 더 가까이, 더 빨리 간다. 풍랑이 문제 아니다.

예수님을 모신 인생은 강하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고, 싶지 않은가? 예수님을 모시고,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지면,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풍랑을 고요하게 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가지를 물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사실 그들은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운 듯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풍랑을 무서워했던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있었다면, 그들도 예수님처럼, 풍랑 속에서, 고요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기에, 그들은 풍랑을 무서워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쳤고, 귀신들도 내쫓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으며, 또 예수님이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돌보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광풍을 만나자, 그들의 믿음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두 경우에, 풍랑이 일어난다. 말씀에 불순종할 때다. 요나가 겪었던 풍랑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다. 그 때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서, 그를 돌아서게 했다.

믿음을 더하게 할 때이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겪었던, 풍랑이 그랬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은 풍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돌봄에 대한 믿음을 더했다. 풍랑을 만났는가?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속히 올바른 길로 돌이키라. 말씀에 순종하는데도, 풍랑을 만났다면 감사하라. 분명 놀라운 이적을 체험할 것이다. 더 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때 제자들의 답변은 어떠해야 했나? “주여 이제부터는 더 이상, 풍랑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돌봄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달랐다.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심히 두려워했다.

풍랑을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풍랑이 그치고 고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요 후의 풍랑이, 새롭게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이, 심히 두려워했나? 그 이유가 하반부에 나온다.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이 질문에는 대답이, 필요 없었다. 그들 모두가 분명하게, 그 대답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때 바람이 저절로 그치고, 바다가 저절로 잔잔하여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니까,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다.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제자들은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바람과 바다를 그토록, 온전히 다스리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창조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가 되어서, 바람과 바다를 온전히 다스린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앞에 서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전능한 하나님,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들은 누구라도, 심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보였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다. 우리의 짐을 예수님께 맡기자(55:22). 우리의 염려를, 모두 다 예수님께 맡기자(벧전5:7).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며, 우리의 모든 풍랑을, 아주 잔잔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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