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11월 18일 - 겨자씨의 비유(막4:30-3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11-18 |
첨부파일: 겨자씨의 비유.hwp(22K) |
겨자씨의 비유(막4:30-34)
‘존’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젊은 청교도 목사였다. 그는 1637년에 아메리칸드림의 원대한 꿈을 안고, 미국에 왔다. 그런데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불행하게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 결핵은 아주 심각한 병이었기에,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임종 직전에, 자기의 재산을 정리했다.
자녀가 없기에,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사용될까를 기도하다가,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 새롭게 시작하는 대학에, 자신의 소중한 책 400여권과, 전 재산의 반을 기증하기로 했다. 기증서와 함께 진실 된 신앙고백이 담긴, 일종의 유언 한 장을 첨부했다.
“나는 이 땅에, 원대한 꿈을 안고 왔다. 나는 좀 더 훌륭한 신학자, 훌륭한 법률가, 훌륭한 과학자가 되고 싶어, 신학과 법률과 과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내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꿈들, 이것을 나의 후학들을 통해서, 후배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 헌정 증서를 받은 학교 이사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젊은 목사 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성을 따서, 학교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의 이름은 존 하버드이다. 그래서 이 학교는 하버드로 불리게 되었다. 작은 꿈과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것을 땅에 심으면, 크게 자라난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을 만큼 된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다. 하나님 나라도 작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커진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된다(욥8:7).
1.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한다(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두 개의 질문으로 ‘겨자씨 비유’를 시작한다. ①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②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이다.
예수님은 전할 말씀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비교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물은 것은 아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깊이 새기기를 바라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했다(1:15).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믿었다. 그래서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었고,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임을 믿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나라가,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서, 천사들도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 살로메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 나라가 영광가운데 임할 때, 한 명은 예수님 우편에, 또 한 명은, 좌편에 앉게 하여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며 배척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방다들이지 않는 자들을 멸하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진짜 임할 것인지, 제자들은 확신이 없었다. 이때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다. 바르게 이해하고, 낙심하지 말기를 바랐다.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겨자씨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때로는 기름을 짜서, 약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겨자씨의 주된 용도는, 양념으로 사용된다. 요즘도 겨자를, 냉면에 넣어 먹기도 하고, 생선회를 찍어 먹기도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겨자씨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나? 밀과 보리 같은 곡식의 씨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지 않았나? 그것은 겨자씨의 특징과, 자랐을 때 보여주는, 특징 때문이다. 겨자씨의 무슨 특징을 가졌는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겨자씨의 특징은 아주 작다. (눅13:19) “땅”을 “채소밭”이라고 했다. 따라서 겨자씨는, 채소밭에 심는 식물의 씨들 중에, 가장 작다. 물론 겨자씨보다, 더 작은 난초의 씨, 담배의 씨도 있지만, 채소밭에서 식용으로 자라지 않는다. 채소밭에서 자라는, 식물의 씨들 가운데서는, 겨자씨가 가장 작다.
아무튼 겨자씨는, 매우 작은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주 작은 것을 ‘깨알 같다.’고 하지만, 유대인은 겨자씨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믿음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눅17:6)이라고 했다. 실제로 겨자씨는, 깨알보다도 더 작다. 그러니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짐작이 간다.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 겨자씨 한 움큼이, 땅에 심기지 않았다. 한 알이, 땅에 심겼을 뿐이니, 눈에 뜨일 리가 없다. 땅에 심긴 겨자씨 한 알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지금, 당장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했다.
(눅17:20)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 빈정거리듯이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안에 임했다.
단지 땅에 심긴, 겨자씨 한 알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 나라도,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그 당시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온 세상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여겼다. 단지 몇 명만, 믿고 따랐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눅12:32) “적은 무리”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주었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낙심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아주 작게 시작함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아주 크게 되니, 소망을 잃지 말아야 했다.
2. 하나님 나라는 아주 크게 자란다(32上).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겨자씨의 첫 번째 특징은, 아주 작다. 두 번째 특징은, 아주 크게 자란다는 것이다.
다른 채소의 씨보다, 훨씬 작지만, 그것들에 비해서, 훨씬 더 크게 자란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했다. 겨자씨가 자라는 과정을, 4개의 동사로 설명했다. ① “심기다” ② “자라다” ③ “커지다” ④ “가지를 내다.” 겨자씨는 채소밭의 식물 중에, 가장 작게 시작하여, 가장 크게 자란다.
채소밭에 심긴 다른 식물들은, 다 자라더라도, 풀의 수준에 불과하지만, 겨자씨는 다르다. 겨자씨는 자라서, 채소밭의 모든 풀보다 커진다. 뿐만 아니라, 큰 가지를 내어, 나무 수준까지 자란다. 겨자씨는 잘 자라서, 보통 삼 미터 정도 높이의, 나무가 된다. 더 큰 것은, 오 미터 이상으로 자란다.
그래서 말을 탄 사람이, 그 가지 밑으로, 지나다니기도 한다. 채소밭에 겨자씨를, 한 알만 심는 이유는 그만큼 크게 자라기 때문이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채소밭의 모든 풀보다, 더 크게 자란다. 나중에는 팔뚝만한, 큰 가지를 낼만한 나무로 자란다.
이렇듯 아주 작게 시작해서, 수십만 배, 수백만 배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겨자씨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했다. 하나님 나라도,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크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했다.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헴이나, 성장한 나사렛도 겨자씨 한 알처럼 미미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말할 정도였다. 로마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전체도, 겨자씨 한 알과 같았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여러 식민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아주 작게 시작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들을 다 합쳐도, 역시 겨자씨 한 알에 불과했다. 그들은 배우지 못했다. 가진 것도 없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지 않았다. 믿음이 처음부터 큰 것도 아니었다. 숫자적으로도 미미했다.
예수님은 열둘을, 제자로 불렀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변절하였다. 예수님이 승천했을 때,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기껏 백이십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아주 작게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하나님 나라는 아주 크게 성장해갔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심었다. 처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한 알처럼 너무 작아서,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조차도, 알아차리지를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커졌다. 안디옥을 거쳐서, 소아시아로 확대되었다.
그러더니 하나님 나라는, 큰 가지를 뻗어서, 지중해를 지나 유럽으로 넘어갔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큰 가지를 내어,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로 뻗어나갔다. 유럽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그 가지는 영국으로, 미국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그 가지는, 우리나라에도 무성하게 뻗어왔다.
뿐만 아니라 그 가지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면서 사방으로 힘 있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장차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은, 예수님이 세세토록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계11:15). 이처럼 겨자씨의 특징은,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가장 큰 것으로 자라나는 데에 있다.
기독교는 가장 작은 것으로 출발해서, 오늘날 가장 큰 것으로, 성장했다. 우리의 현실이,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찾자.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있으면, 소망을 이루어준다.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나중을, 심히 창대하게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의 통로다(32下).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땅에 심겨지면, 달라진다. 싹이 나서 자라면, 모든 풀보다 커진다. 큰 가지를 낸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게 자란다. 다 자란 겨자나무는, 큰 가지들로 울창하다. 자연히 겨자나무 아래엔, 좋은 그늘이 생긴다. 그러면 새들은, 그 그늘에 와서, 더위도 피하며, 비바람도 피한다. 더군다나 겨자씨는, 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기에, 많은 새들이 그 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같은 내용 (마13:32)에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했다. 겨자나무가 큰 것은, 5미터까지 자란다. 가지도 큰 것은 팔뚝만하다. 그러므로 공중의 새들은, 겨자나무의 가지에, 둥지를 튼다. 물론 여기서 땅에 심긴 겨자씨가, 그만큼 아주 크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영적 진리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겨자씨가 자라남으로 인해, 그 지역에 사는 공중의 새들이 혜택을 누린다. 한 나라가 든든히 서면, 자연히 그 보호 아래, 모든 이들이 안전하게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 혜택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 나라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그 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축복을 맛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 민족은 점차 크고도,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곳곳에 학교와 병원이 섰다. 어린아이와 여성들, 그리고 천민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도 선교사들을 보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임을 받는, 복된 나라가 되었다.
북한은 복음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놀랍고도 많은 혜택들을 얻지 못했다. 지금도 어렵게 살면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우리 모두,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자.
우리 덕분에,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맛보게 하자. 그러면 자연히,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다. 현실이 어려운가? 낙심하지 말라. 겨자씨 한 알을 생각하면서, 소망을 갖자.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줄 것이다. 지금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다른 이들을, 더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지 말자. 씨를 뿌리다 보면, 좋지 못한 땅이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계속 성장하고, 하나님이 예비한 좋은 땅들도, 많기 때문이다.
(33-34)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성경이 모두 비유가 아니다. 신천지는 그렇게 가르치기에, 엉터리해석을 한다.
씨는 말씀이고, 밭은 마음이고, 새는 마귀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새들, 즉 마귀가 와서 깃드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되겠는가? 문맥이 중요한데, 새는 사탄으로 했으니(막4:15), 새를 모두 사탄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중목적이 있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는 심판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가,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욱 풍성하게 알려주는 은혜였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는, 모든 비유를 해석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더 확실하게 알아갈 수 있었다. 본문에는 “겨자씨 비유”의 내용만 나올 뿐, 예수님의 해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겨자씨 비유”를 해석하며,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도록 해주는가?
(요14:16)을 보면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가, 계실 것이라고 했다.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 있으며 돕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혜사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깨달아 알도록 도왔다.
그러면 예수님이 승천한 후에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보혜사가 되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있는 분은 누구인가? 이○○가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다. (요14:26)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 보혜사가 되어서, 모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올바로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영원토록 함께 한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자. 예수님을 높이며,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바란다. 씨를 뿌릴 때,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뿌리기 바란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되고,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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