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10월 21일 - 여러 땅의 비유의 해석(막4:10-20)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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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땅의 비유의 해석(막4:10-20)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 “여러 땅의 비유”를, 예수님이 직접 해석한 말씀이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예수님 곁에는, 열두 제자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 남았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2가지를 물었다. ① 비유로 말씀한 이유(마13:10) ② 비유의 뜻을 물었다(눅8:9). 본문은 2가지 이유를 말씀한다. 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한 이유를 밝혔다(11-12). ② 예수님은 “여러 땅들의 비유”를 친히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13-).
무리들은 예수님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비유에 대해 묻지 않고 떠났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 아니었다. 좋지 못한 땅, 들을 귀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함께한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 비유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었다. 좋은 땅이었다.
들을 귀가 있는 자였다. 우리도 하나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고, 좋은 땅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들을 귀가 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밝혀주는, 여러 땅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분명히 깨닫기 바란다.
1. 비유로 말씀한 이유(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기도 하고, 비밀을 감추려는 2중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진 ‘너희’는, 즉 예수님의 참 가족이다(막3:35). 좋은 땅(4:8)에 해당하는 사람, 들을 귀(9) 있는 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10)이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눅8:10).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자세하게 깨우쳐주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진 “외인”은 누구인가? 이들은 ‘너희’와는 다른 ‘외인’, 예수님의 참 가족이 아닌, 좋지 못한 땅에 해당하는 자, 들을 귀가 없는 자,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일에, 관심이 없는 자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는 은혜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라고 했다.
예수님은 말씀과 이적을 통해, 자신은 성경이 말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충분히 드러냈다. 그렇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사탄이 들렸다면서, 죽여야한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더 이상 주어질 은혜는 없다. 은혜의 문은 닫혀버리고, 오직 심판 남았다.
말씀을 받지 않는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직접 말씀하지 않고, 비유로만 했다. 멸망할 백성들 가운데,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로 남아있었다. 많은 유대인이 배척했지만, 믿고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우치는 은혜가 되었다.
2. 기본이 되는 비유(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예수님은 이 비유를 알지 못하면, 다른 비유도 알지 못한다면서, 그만큼 중요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비유라 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바르게 잘 이해해야 하고, 바르게 적용을 해야 한다.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서 “뿌리는 자”가 누구인지, 설명이 없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이 말씀을 “뿌리는 자”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말씀을 전하는 자는, “뿌리는 자”에 해당한다. 그러면 무엇을 뿌렸나? (눅8:11)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한 “여러 땅의 비유”에 나오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뿌리는 자가, 뿌려야 할 씨는, 정해져 있는데,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하나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었기에, 씨를 뿌리는 자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을 뿌려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변경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면, 다른 복음이다. (갈1:9)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살아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벧전1:23). 흔히 전도한 후에, 결실이 없으면 낙심하고, 씨를 탓한다. 또는 뿌리는 방법이나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무슨 특별한 훈련이라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뿌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씨가 나서 자란다(막4:27).
3. 비유에 대한 해석(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여러 땅의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말한다. 여러 종류의 땅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마13:19中)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했다. (눅8:12下)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했다. 이처럼 “땅”은,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추수의 문제는, 씨에 있지 않았다. 씨를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땅에 있다. 하나님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문제다. 이단들은 여기서, 말씀에는 2종류가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속지 말라. 다른 말씀(가라지)을, 살짝 연결시킨 것이다.
① 그러면 길 가는, 어떤 마음인가? 길 가는 경작되지 않았다. 그 위로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단단하다. 마찬가지로 길 가는,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 굳을 대로 굳은 마음을 말한다. 길 가에 뿌려진 씨는, 땅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그대로 땅위에 남아있기에,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
길 가와 같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그러면 사탄이 즉시 와서, 말씀을 빼앗아버린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서, 예수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씀을 들을수록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수님은 그들은, 그들의 아비 사탄에게서 났다고 했다(요8:44).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의 아비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았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의 자식이 되어, 구원을 받지 못했다.
(16-17)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② ‘돌밭’(페트로데스)은 암반 위에 있는, 땅이다. 암반 위에는, 수분이 고여 있다. 흙도 얕아, 곧 싹이 난다. 영양분이 위로 올라가기에, 한 동안은 잘 자란다. 그러나 뿌리가 없기에, 결국 햇볕에 타서, 말라죽는다. 그러면 돌밭은, 어떤 마음을 말하나? 깊지 못한 마음이다. 한 마디로 경박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감정에 쉽게 좌우된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기는 한다. 그리고 한 동안은, 다른 사람보다 더 뜨겁게, 잘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이 기쁘다고, 구원받은 증거는, 될 수 없다. 물론 구원받으면 기쁘지만, 기쁨 자체가 구원의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면, 속을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한다. 감정에 따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곧” 기쁨으로 말씀을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요6장).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예수님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 날도, 예수님이 줄 떡을 바랐지만, 그들에게 떡을 주지 않고, 생명의 떡에 대해서만 말씀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이 떡을 먹어야 산다고 했다.
그래서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다(66). 그들은 돌밭과 같은 마음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마음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말씀으로 인해, 그들이 받을 환난이나 박해를 생각하자,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기쁘지 않아서, 예수님을 떠나갔다.
반면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자(고후12장). 그의 육체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절하게 주께 간구했다. 그러나 그의 육체에 있는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 때 바울은,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약함을 오히려 감사하며, 기뻐하며, 자랑했다.
돌밭과 같이, 감정에 좌우되는 얕은 마음이 되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모든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는, 깊은 마음이 되자. (18-19)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어떤 땅은, 가시떨기의 뿌리가 남아있다. 이런 땅에 떨어진 씨는 계속해서, 가시떨기와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 비록 싹이 나서 자라더라도, 가시떨기에 막혀서, 잎이나 가지가, 제대로 뻗지를 못한다. 그 결과 추수 때가 되어도, 결국은 결실하지 못한다.
③ 그러면 가시떨기의 땅은, 어떤 마음을 말하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이중적인 마음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다(마6:24). 정함이 없는, 두 마음이다(약1:8). 이런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결과는, 마음속에 있는, 온갖 세상적인 생각과 욕망이, 가시떨기의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이곳에 뿌려진 말씀은, 그런 것들이 기운을 막아서, 아무 결실을 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그랬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린 데마가 그러했다(딤후4:10).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난, 부자 청년이 그랬다(마19:22).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여기에서 좋은 땅은, 흙이 단단한 길 가와는 달리, 흙이 부드럽다. 흙이 얕은 돌밭과는 달리, 좋은 땅은 흙이 깊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는 달리, 좋은 땅에는 전연 잡초가 없다.
④ 좋은 땅은, 어떤 마음을 가리키겠는가? 부드러워서,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감정에 따라, 말씀을 받지 않고, 말씀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좋은 땅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히 좋지 못한 땅, 황폐한 땅이 된다. 따라서 땅을 경작해서,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땅속에 있는 암반을, 제거해야 한다. 가시떨기와 같은 잡초도, 없애야 한다. 우리 마음도, 저절로 좋은 마음이 되지 않는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의지로는, 될 수가 없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하게 한다. 그 결과 우리 마음은, 좋은 땅이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결실한다. 여기에 세 종류의 결실이 나온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결실은, 7.5배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들 3종류의 결실은,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수확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긴 은사는, 서로 다르다.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보라.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겼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그러자 주인은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했다. 또한 두 종 모두를 똑같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했다. 두 종 모두는,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똑같이 주인에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 당시에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길 가, 돌밭,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자의 수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결론이다. 먼저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한다. 우리 마음이, 길 가, 돌밭,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같으면 결실하지 못한다. 좋은 땅이 되어서, 풍성하게 결실하기 바란다. 부지런히 씨를 뿌리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자. 더욱 힘써 생명의 말씀을 밝히자.
더 많은 씨를 뿌릴수록, 좋은 땅에 떨어질 확률은, 그만큼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뒤에 하나님이, 그것들을 자라나게 하실 것이다. 말씀이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는, 좋은 마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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