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10월 7일 - 예수님의 가족(막3:31-3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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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족(막3:31-35)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사61장)말씀을 읽고, 거기에 예언된 메시아가, 자신임을 밝혔다. 그렇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자,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했다. 나사렛 사람들은 화가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낭떠러지로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 했다(눅4:29).
그 때 예수님은 기적으로, 그들 가운데로 피하여 지나갔다(눅4:30).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거기서 조금 떨어진 해변, 가버나움으로 옮겼다. 그 때부터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갈릴리의 나사렛이 아니라, 갈릴리의 가버나움이 되어, 예수님의 ‘본 동네’(마9:1)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막3:20-21)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이 계신 집에, 무리가 다시 몰려오자,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 친족들은, 나사렛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던 일을 기억하고, 가버나움에서도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붙들어, 데리고 가야만,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친족들이 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고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은 사탄보다 더 강한, 하나님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나오는 말씀이, 오늘 말씀이다.
1.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왜 밖에 서서,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을까? 2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① 무리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집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2:2). 그래서 사람들이, 그 집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내려 보냈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무리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접근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밖으로 불러냈다.
②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처럼,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대신 들여보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젊어서 힘도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려는 마음만 있다면, 직접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에서 하는 일이 못마땅하니,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7:5).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 사역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말을 들었다. 남자를 알지 못할 때, 그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증언도 들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기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자신의 구주임을 믿었다(눅1:47).
그러나 마리아도, 때로는 인간적이고, 혈연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대했다. 열두 살 때에 예수님이, 성전에 머물러 있자, 마리아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다. 가나 혼례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도, 마리아는 걱정하며, 예수님을 찾아서, 그 사실을 일렀다.
이때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을 망각하고, 인간적이고 혈연관계에서만, 예수님을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데리러,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가족을 구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또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 있지는 않는가?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에 있지 않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와서, 겸손히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다.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님은 앉은 무리에, 둘러 쌓여있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들 모두를 헤치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앞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말을 앞 사람에게, 전했을 것이다.
그의 말은 계속 전달되어서, 나중에는 예수님이 앉은, 맨 앞 사람에게까지 전해졌다. (마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맨 앞줄에 앉은 한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했다.
여기에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등장하지 않는다. (막6:3)은, 예수님을 배척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했다.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요셉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들 4명의 이름(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누이들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자녀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첫아들’(눅2:7)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녀 설을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이들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마리아의 남편, 즉 요셉의 전처소생이라 한다. 또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예수님의 사촌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마리아를 높이려는, 잘못된 태도에서 나왔다.
(눅11:27-2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마리아를 높이려고 했다.
요즘 말로, 전형적인 천주교 신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높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를 높였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기에, 마리아를 높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높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막으려고 했다.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이었다. 그들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높여서는 안 되고, 예수님만 높여야 한다.
2. 예수님의 영적인 가족들(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왜 예수님이 이 같은 질문을 했나? 예수님의 가족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그의 가족조차도 몰라볼 정도로, 미쳤기 때문인가?
예수님이 기분이 나빠서, 그의 가족을 무시했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동생들이, 믿지 않고 있음을 잘 알았다. 또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붙들러 온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요19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겼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보라 네 어머니라.”(27) 이렇듯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아볼 만큼 사랑했다. 그의 동생들도 사랑했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는, 백이십 명 정도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그러다 오순절에, 그들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 곳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있었다(행1:14). 또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의 누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동생들을 모두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만큼, 그들 모두를 사랑했다. 따라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은 의도는, 예수님이 그의 가족들을, 모른 체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한 예수님이 그의 가족들을, 경멸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육적이고 혈연적인 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것은 참 가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영적 관계를 맺은 자들이, 참 가족이다.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3)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기 위해,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았다. 그 곳에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마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했다.
예수님은 눈으로 제자들을 둘러보며, 손으로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완악한 마음을 둘러보고 ‘노하셨다.’(막3:5).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잔잔한 미소로, 제자들을 둘러보셨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막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육적 가족을 버린 자는, 그것의 백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육적이고 혈연적인 가족을 잃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영적인 가족들을 새롭게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적인 가족의 수는,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다. 영적 가족의 수는 무수하며, 영원하다.
그러기에 육적인 가족보다도, 영적인 가족이 더 중요하다. 뒤에 예수님의 동생들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1:1)라고 불렀다.
육적 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었다. 유다도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 유다’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유1:1)이라고 칭했다. 유다도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3.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길(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구든지’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들어간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도 포함된다. 아울러 우리 모두도, 다 해당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온전하지 않다. 그들은 종종 예수님께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았다. 예수님이 사로잡힐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족으로 삼아주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허물이 너무나도 크고, 우리의 믿음도, 한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리를 한 가족이 되게 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며, 참 가족이다.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삼아주었다. 이는 분명히,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 말씀 속에, 한없이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는지 밝힌다.
이 말씀에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이, 설명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말하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물론 예수님은 여기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
(눅18:11)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는, 세리들이나 창녀들보다 더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그의 가족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리들이나 창녀들을, 그의 가족으로 삼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했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리들과 창녀들은 달랐다. 물론 그들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는,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었다. 그러므로 서로가 이해와 사랑, 따뜻함, 보살핌과 그리움이 필요하다.
결론이다. 저는 부족하고, 허물도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를 택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의 가족으로 삼아주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늘 나를 돌본다. 예수님은 내가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 늘 친히 나를 거느린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나다.
이 은혜를 항상 생각하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내 구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자.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나와 영원한 가족이 된, 나의 믿음의 형제들을 힘써 사랑하자. 이것이 오늘 결론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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