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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년 9월 16일 - 예수님을 보는 시각(막3:20-26)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8-09-16
  첨부파일:   예수님을 보는 시각.hwp(21K)

예수님을 보는 시각(3:20-26)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베푼 지혜로운 스승이었다. 또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사랑을 몸소 실천한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와 같은 견해는,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겸손한 사람이, 자기를 창조주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임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님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 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2:28)이라 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14:9)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밝힌 이상, 예수님을 지혜로운 스승이나, 훌륭한 지도자로, 단순하게 간주하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3가지 중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일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도 되지 않는 일에, 가정도 살피지 않고, 일하느라 밥도 먹지 못하니,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니, 예수님을 안다는 친족들은, 미쳤다고 보았다. 한 정신병자가 나는 세종대왕이다.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정신병자가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대꾸했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에게 이러한 증세가 있다고 보았다(21). 그러나 예수님은, 미치지 않았다. 미친 사람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이 각종 병을 고치며, 더러운 귀신을 내쫓을 수 없다. 또 미친 사람을 보기 위해,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종교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다.

서기관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졌다. 예수님의 능력이, 사탄을 힘입었다고 보았다(22). 그들은 예수님이,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자기를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기꾼이 될 수 없다. 사기꾼이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고, 모든 사람들이 따르려는 진리를 선포할 수 없다. 사기꾼이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할 수 없다. 사기꾼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자신이 한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기에, 사기꾼이 아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보다 더 강하다고 말씀했다(27). 사탄보다 더 강한 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밝히 드러냈다. 예수님은 미치지 않았다. 거짓 사기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님이다.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다. 육의 세계, 영의 세계, 자연 세계를 다스린다. 죽음도 다스린다.

따라서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다. 이런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성령님은 네 권의 복음서를, 기록되게 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네 권의 복음서는,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증언하니,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한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어야만 한다. 믿으면 산다. 천국으로 가지만, 믿지 않으면 지옥이다. (20:28)에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며,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자. (4:12)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1. 무리들로 인하여 바쁜 예수님(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에 들어갔다(1:29). 가버나움에 있는, 레위 집에 들어갔다(2:15).

따라서 이때도,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집에 들어갔다. 아마 시몬의 집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들어가자, 무리가 다시 몰려왔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각처에서 크고도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다. 몰려오는 무리 때문에, 예수님과 그의 열두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정식 만찬을 할 시간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간단히 빵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는 의미다. 왜 바쁘게 사는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아닌가? 베드로는 언제든지, 주님이 필요로 할 때에, 자기의 집을 내어 드렸으며, 이 문제로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 귀찮기도 하고, 파손되는 것도, 적지 않았을 텐데, 조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주님과 함께한, 열두 제자들 역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따랐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교인들 중에 상당수가, 자기를 위해서는 바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극적으로 임한다.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참된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다(14:7-8). 자기를 위해 살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은, 교인은 될 수 있어도, 성도는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전10:31). 주님을 위해, 바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학자로서 성공하고, 정치인으로서 성공하고, 경제나 예술, 체육, 그밖에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무리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대부분 무례했다. 예수님이 계신 집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었다(2:1). 또한 무리는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3:9).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하라고 명했다. 무리는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식사를 하려고 했다면, 그들은 문을 부수고라도,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2. 예수님을 미쳤다고 보던 사람들(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의 친족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을 가리킨다(3:32).

예수님에게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이라는 형제들과, 누이들이 있었다(6:3).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이미 죽고 난 뒤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1:9).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집에 있는데, 그 곳으로 모여드는 무리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하는 예수님을, 붙들러 나아왔다. 그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나사렛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을 미쳤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6:3)라 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목수 일을 했다. 목수 일을 하는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물론 그 동안에도 예수님은, 전혀 죄를 짓지 않아, 동생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았다(7:5). 그 동안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기회가 없었다. 예수님은 동생들 앞에서 의자야 있으라, 책상아 있으라.”고 하면서,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후에도,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는, 이적을 행하지 아니했다.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님의 동생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 때부터 예수님의 떠돌이 생활은, 시작되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들려왔다. 그런데 좋은 소식만, 들려오지 않고, 나쁜 소문들도 많았다. 예컨대 예수가 유대인들의 전통을 무시한다더라, 예수는 세리 및, 죄인들과 어울린다더라,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더라,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다더라.”

물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녀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직 믿어지지 않았다. 결국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나사렛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예수님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붙들러 나왔다.

물론 그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미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며, 미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1:14).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또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신서 첫머리에서, 자신들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을 미쳤다고 보는 사람은, 여기에 없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특별하게 미친 사람들은 꽤 있어왔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나는 석가모니다, 나는 마호메트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나는 예수다.”라고 한다. 사탄이 미혹하는 이름은 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지 못하게 한다. 사탄에게 미혹되면, 구원 받지 못한다.

3. 예수님을 종교 사기꾼이라고 보던 사람들(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1:28)했다.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리만 아니라, 수도 예루살렘에도 전해졌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조사차원에서 서기관들을 보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내린 결정은,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대교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해서(3:6).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결론을 내렸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곧 사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탄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벨리알도 있다(고후6:15).

(왕하1:2)을 보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이 나오는데, 그 뜻은 파리들의 주.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신을 경멸해서, 바알세불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배설물의 주.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바알세불을 사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면 왜 유대교는 예수님의 친족들처럼, 예수님이 미쳤다고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는가? 예수님이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 때문이다. 초자연적 존재인 하나님이나, 사탄만이 이같이, 놀라운 권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교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사탄이 들렸기에, 사탄의 능력을 힘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그들의 논리는 억지였다.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즉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을, 심판할 수도 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버리든지, 아니면 땅이 갈라지게 해서, 그들을 삼켜버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는 비유로 말씀하면서,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논리적으로 깨우쳤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대답은 분명하게 아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사탄이 대적하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4-25)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예수님이 말씀한 비유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진리다. 스스로 분쟁하면, 설 수 없다. 나라도 설 수 없고, 집도 설 수 없다. 분쟁하면 망한다. 국가도 망하고, 가정도 망한다. 이것은 언제나 보편타당한 진리다.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탄은 하나님을 거슬러 일어나지,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지 않는다. 사탄은 바보가 아니다. 따라서 사탄이, 자기 스스로 망하는 짓을 할리가 만무하다. 예수님이 말씀한 비유의 의도는 분명하다. 서기관들은, 유대교를 대표해서, 예수님은 사탄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전혀 타당성이 없었다. 상식적으로도 모순된 말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사탄의 종으로 몰아세우면서, 예수님을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인 것처럼 여겨지게 했다.

예수님을 사탄의 종이나, 종교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기는, 서기관들과 매일반이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이다(20:28). 도마가 했던 고백이다.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같은 고백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이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도록, 은혜를 베푼 하나님을 찬송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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