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8월 19일 -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나?(막3:1-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8-19 |
첨부파일: 왜 예수님을 죽이려는 했나.hwp(22K) |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나?(막3:1-6)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더러운 귀신들도 내쫓아주었다.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는, 2가지였다.
①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주었다(요5장). 본문에서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다. 몸이 꼬부라진 여자(눅13장), 수종병이 든 사람을 고쳐주었다(눅14장).
이들의 병을 고쳐준 날은, 모두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지 못하게 되었다. 일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범한다고 보았다.
②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감히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여겼다.
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말씀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8)고 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밝혔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출34:1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보았다. 예수님이 명백하게, 신성 모독을 했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나? 물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생각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과 타협을 하거나, 그들을 달래기 위한, 회유책을 쓰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거룩하기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기에, 항상 진리만 말씀하며, 진리를 따라서 행했다. 그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은 언제나, 진리를 밝히 드러냈다.
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배경(1-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님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다. 따라서 안식일에,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거기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6).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시하고 있다’는 미완료형이다. 그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의 각종 병을 고쳤다. 문제는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가에 있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다(출20:1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에 많은 조항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전통으로 삼았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병든 자를 치료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물론 안식일에도, 생명이 위급할 경우에는 예외였다. 그러나 생명이 위급한 경우라고해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안 되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실례가 나온다. 사고가 나서, 무너진 집에 사람이 깔렸다. 만일 그 사람이 살아있으면, 안식일이더라도 그를,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죽었으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손 마른 사람은, 긴급하게 생명을 구조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전통은,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치면, 안 되는 것이다. 안식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그를 고쳐주어도, 상관이 없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신다(요2:25).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전지하다. 바리새인들은 회당 안에 있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고발할 구실을 찾는데 있었다. 그들은 “얼른 그를 고쳐줘라. 그러면 너는 그 길로 끝이다.”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그러면서 악의에 찬 시선으로, 줄곧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긍휼이 풍성한 예수님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사랑과 긍휼의 눈빛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나 예배를, 원하지 않는다. 인애, 즉 긍휼과 사랑을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기를 바란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먼 곳에 있는 자들을, 사랑하려고 들지 말자.
지구촌이니, 인류니 하는 거창한 말로, 사랑을 떠들지 말자. 작은 것부터, 가까운 곳부터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내 곁에 있는 사람, 사랑하기 어려운 그 사람, 사랑하고 싶지 않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사랑하자. 바로 이것을 하나님은 원한다.
2. 예수님의 질문과 바리새인들의 대답(3-4).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고서, 메시아로 믿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과 의도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고발하려는 악한 마음으로, 고쳐주기를 바랐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에, 얼마든지 드러내지 않고도,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수 있다. 안식일이 지나고, 내일이나 모레쯤에, 그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었다. (눅6: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했다.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회당 한 가운데에, 그를 세웠다. 그가 일어나 섰다. 그는 손이 말랐기에,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었고, 자기 힘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있었다.
또 자기의 발로 걸어서, 회당 한 가운데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있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 고침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전통을 무시한 채,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려는 듯, 그를 회당 한 가운데에 서게 했다.
따지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전문가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알지만, 그들의 용어를 사용해서,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그 대답은 물론 ‘네’다. 다른 날도 선을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안식일에 악을, 행하면 안 된다.” 안식일은 물론이요, 다른 날에도 악을 행하면 안 된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대답은 ‘네’이다. 비단 안식일만 아니라, 일주일 내내,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안식일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대답은 ‘아니요’이다. 그것은 안식일을 포함해서, 그 어느 때라도, 옳지 못한 일이다.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분명히 선한 일이다. 반대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분명하게 악한 일이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다(약4:17).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선한 일이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가, 유대교 전통에 얽매여 있으면,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따라서 그를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한 일, 생명을 구원하려고 한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하려 한다.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죽이려고, 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고, 고침 받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러니 누가 옳은가? 바리새인들은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며,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대답하면, 손 마른 사람을 고쳐도, 고발할 수 없다.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선, 악을 행하며,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하면,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은 악한 자라고, 스스로 정죄하는 셈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고, 또 저렇게 대답할 수도 없어서 잠잠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말씀은, 안식일에는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었다(마15:6). 성경을 떠나면, 비극과 불행이 초래된다. 성경에서 벗어나지 말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기 바란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모하자(시19:10).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 꿀보다 더 달게, 여기기 바란다.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잠잠했다. 미완료형이다. 계속해서 입을 다물었다. 따라서 그 자리에는, 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3.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5-6).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셨다(페리블렢사메노스). 그들의 심령을 꿰뚫어보니,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다. ‘완악하다’(포로세이, 포로시스)는 ‘무감각함, 어두움, 굳어짐’을 말한다. “대리석처럼 단단하다.”(포로오)에서 나왔다. 예수님의 질문에도 그들은, 전혀 뉘우치지를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보면서, 예수님은 2가지 반응을 보였다. ① 탄식하고 ② 노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탄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노여워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죄인들을 불쌍히 여긴다.
예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한다(딤전2:4).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오늘 본문에서 탄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한다. 그러기에 채찍을 들고서,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공의가, 노하심으로 나타났다.
(사1:5上)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했다. 마음이 완악해서 돌아서지 않으면 망한다. 예수님이 탄식할 때, 죄악 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늦기 전에 돌아서야 한다. 돌아서면 용서를 받고, 고침을 받는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제 예수님은 실제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자 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진리를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언제나 진리를 따라서 행동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요1:3). 예수님은 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순식간에 그에게, 새로운 손을 만들어주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나의 메마른 것들을 회복시켜준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며, 하나님을 확신하기 바란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마른 손이 즉시 성한 손, 정상적인 손, 건강한 손으로 회복되었다. 이 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마땅하겠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이적, 하나님만이 행하는 창조의 역사를, 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해야 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다.”고 고백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눅6:11上)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라고 했다.
그들의 마음은 그만큼 완악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가자말자, 곧바로 헤롯당을 만났다. 그리고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다. 여기에 나오는 헤롯당은, 유대교의 종파가 아니었다. 당시의 유대교는, 네 파로 나누어졌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파였다.
헤롯당은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종의 정치세력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교만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헤롯당은 로마를 등에 업고, 정치권력을 즐기던 속물들이었다. 따라서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손을 잡아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로마인에게만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 로마를 등에 업고 있는, 헤롯당과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법정에서, 고발하는 내용은 이랬다.
(눅23:2中)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거나, 신성 모독을 했다는 말은, 전연 없다. 유대교의 종교적인 문제로는,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다른 죄목들을 뒤집어 씌워야만 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이것들을 의논을 했다. 그 결과 그들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허위 사실들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고발하기로, 음모를 꾀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그들은 “지옥의 자식”(마23:15)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회개하고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빌3:5)에 의하면, 사도 바울도 본시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심하게,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다. 그러던 그가,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어, 순교하는 날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결론이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행4:12). 그래서 오늘도 결론은 같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다.” 믿으면 산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멸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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