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8월 5일 - 비난에 답변하는 예수님(막2:18-2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8-12 |
첨부파일: 비난에 답변하는 예수님.hwp(22K) |
비난에 답변하는 예수님(막2:18-22)
예수님이 세리 레위, 즉 마태의 집에 들어가 잔치를 하고, 집밖으로 나올 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을 비방하는 질문을 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했다.
이것이 지난주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때 그 곳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만, 있던 것이 아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합세를 해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다. 우리는 금식하고 있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는가?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다(눅18:12). 침례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규례에 따라서 금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기는커녕, 먹고 마시면서, 만찬을 즐겼기에,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때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마9:14).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눅5:33). 그들은 합세해서,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다. 당시의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눅18:11-12). 월요일과 목요일은 금식하는 날로 정하고, 이틀 동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입에 대지를 않았다.
그러나 성경이 규정하는 사항은, 결코 아니었다. 성경이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금식일은, 일 년에 단 하루였다. (레16장)에 나오는 속죄일이다. 그 날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금식해야만 했다. 물론 속죄일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는 언제든지, 금식할 수가 있었다.
에스더서에서 유대인들은, 사흘을 금식했다. 또 다니엘은, 삼 주를 금식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십 일을 금식했다. 이와 같은 경우들은, 다 자발적인 금식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자발적으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 이유는 이렇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다. 그 때 모세는, 시내 산에서 사십 일을 금식했다.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하기 위하여, 시내 산으로 올라간 날이, 목요일이었다. 그리고 모세가 금식을 끝내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날을 기념하면서, 이레에 이틀 씩 금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참 마음으로 금식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지적한 대로,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금식했다(마6:16). 외식으로 슬픈 기색을 하며, 일부러 얼굴도 흉하게 했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점이었다.
그 때 바리새인들만, 금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제자들, 곧 침례 요한의 제자들도, 역시 금식하고 있었다. 그 때 침례요한은, 이미 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마4:12).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금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했다. 물론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가, 같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기에,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그와 같이 악독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식하고 있던, 침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몰려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도대체 당신은,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느냐는 뜻이다.
어찌 금식하는 날에 금식하지 않고, 도리어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는가? 이것은 분명히 당신의 가르침에는 문제가 있다면서, 예수님을 비방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며, 찬양하며, 헌금하며, 예배드리는 등, 모든 신앙생활은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감사가 넘칠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면, 불평이나 원망이 생긴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비판하지 말자. 우리 눈 속에는, 들보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티를 불평하지 말고, 우리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는 일에, 늘 힘쓰기를 바란다.
2. 비난에 답변하는 예수님(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변을 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초상집에서는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잔칫집에서는 웃으며, 춤을 추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물론 예수님이고, 손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그 동안 모든 사람이,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이제 메시아인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항상 들었다.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는 능력도, 직접 보았다. 그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기에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면서, 슬퍼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춤을 추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때다.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잔치가 끝나면, 손님들이 집으로 되돌아간다. 신랑과 신부만 남아서,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산다. 이것이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될 날을 말씀했다.
예수님의 의도는, 지금 제자들은 금식할 때가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자연히, 금식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때에 제자들이 하는 금식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금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금식을 습관적으로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슴을 찢는 슬픔의 표시로, 참된 금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을 때, 과연 그들은 슬퍼하며 금식했는가? 성경에 그런 내용은 없지만, 유추해 볼 수 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었다(눅24:17). 그들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동안에,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그러나 (눅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
예수님 말씀대로, 신랑을 빼앗겼을 때,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금식할 때였다. 부활한 예수님은, 그들과 먹을 것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제 부활했기에, 빼앗겼던 신랑을 되찾았다. 따라서 신랑과 함께 있기에,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사라졌다. 왜냐하면 부활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없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해야 마땅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28:20中)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했다. 부활 승천했지만, 성령님을 보내주었다.
그러기에 우리도, 바울과 같이,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살다 보면, 금식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의무적으로 금식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에,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영원토록 함께 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늘 기뻐하고,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삶이되기 바란다.
3. 관점의 차이를 바꾸기를 원한 예수님(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옛날에는 면이나 털실과 같은, 천연 섬유로만 옷을 만들었다. 따라서 옷을 물에 빨면, 아무래도 옷이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낡은 옷에, 구멍이 나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기울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옷을 물에 빨 때, 생베조각은 오그라들지만, 낡은 옷은, 이미 많이 줄어들어, 더 이상 오그라들지 않는다. 생베조각이 오그라들면서, 낡은 옷을 잡아당기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히 낡은 옷에 생긴 구멍은, 더 커지게 될 것이고, 낡은 옷의 해어짐도, 더 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함께 기울 수 없었다. 그러면 생베 조각은, 무엇을 말하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보여주신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 모든 것들을 한 단어로 하면, 무엇이 되겠는가? (막1:1)에 있는, ‘복음’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낡은 옷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성경과, 구약의 율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낡은 옷은, 당시의 유대교를 말한다. 그 당시의 유대교는, 외식과 형식에 사로잡혔다.
성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통을 고집하면서,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기를 좋아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의 유대교는, 거짓 종교였다. 반면에 복음은, 인간의 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온전한 의가,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생베 조각, 곧 예수님의 복음을 낡은 옷, 곧 그 당시 유대교의 전통에, 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옛날에는 유리병과 플라스틱 그릇들이 없었기에, 염소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그 속에 포도주를 담아서 보관했다.
염소 가죽은 아주 유연하면서도, 신축성이 뛰어나기에, 포도주를 담아두기가, 매우 적합했다. 염소의 목을 먼저 잘라내고, 그 밑으로 가죽을 벗겨낸다. 염소의 가죽은 부드럽고, 신축성이 좋아서, 통째로 잘 벗겨진다. 네 발의 구멍은, 꿰매서 봉해버리고, 목 부분을 끈으로 매어서, 가죽부대의 입구로 사용한다.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수확한 포도를, 큰 통에 넣고서 짓이긴다. 그러면 처음에는 포도즙이 된다. 그것을 가죽 부대에 담아두면, 포도즙이 발효하면서, 가스가 나온다. 그러다 보면, 가죽 부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가죽 부대가 부풀어 오르면, 포도주를 다른 가죽 부대로 옮긴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면, 밑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는, 다 걸러지고. 아주 질이 좋은, 묵은 포도주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사항은 있다. 새 포도주일수록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왕성하게 발효하기에, 그만큼 신축성이 좋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만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는 이미 늘어날 대로 다 늘어나서, 더 이상의 신축성이 없다, 따라서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버린다. 그 결과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앞선 비유와 똑같다.
여기서의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킨다. 아울러 낡은 가죽 부대는, 외식과 형식과 전통에 사로잡힌, 그 당시의 유대교를 가리킨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고자 했다.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교의 틀에 넣고자 했다.
그러나 복음과 유대교는, 결코 양립할 수도, 조화를 이룰 수도 없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을 배척하고, 인간의 의만 내세우는 유대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과 유대교와의 관계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타종교와의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가 지나쳐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가 대두된다. 쉽게 말해,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았다. 다른 종교들도, 유대교처럼, 인간의 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코 복음을, 타종교의 틀에 집어넣을 수 없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를 버리듯, 복음을 타종교의 틀에 끼어 맞추려 하다보면, 복음을 잃어버리고 만다. 복음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려 들지는 않는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려 들지는 않는가?
묵은 포도주만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원하지 않는 모습은 아닌가? 모든 외식과 형식을 다 버리자. 오로지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자.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를 듬뿍 받아, 날마다 새 포도주와 같이, 생명력이 넘치기를 바란다.
관점을 바꿔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관점을 바꾸면, 복음이 보인다. 관점을 바꾸면, 미운 사람이 사랑스럽다. 관점을 바꾸면, 이해되지 않던 사람들도 이해된다. 관점을 바꾸면, 원수도 사랑하게 된다. 관점을 바꾸면, 검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때때로 악한 일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악을 자행한다. 사람들은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악용해 왔다.
그렇기에 “가장 하나님적인 것이, 가장 악마적일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면,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전에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백인들도,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백인의 하나님’이며, 흑인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신들의 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편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고, 다른 편에서는 주님의 사랑을, 만방에 전파하자고 외쳤다. 바꿔야 할 관점을 바꾸지 못하면, 악이 행해진다.
①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복음을 알 수 없다.
②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나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나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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