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7월 29일 - 죄인을 부르러 온 예수님(막2:13-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7-29 |
첨부파일: 죄인을 부르러 온 예수님.hwp(22K) |
죄인을 부르러 온 예수님(막2:13-17)
지난주에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왔던, 한 중풍병자의 죄를, 예수님의 권세로, 사하여주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 하는 자로 여겼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왜 그들과 함께 했는가를, 밝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본문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의 죄를 사하여주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 죄인의 대명사, 세리를 부른 예수님(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앞에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은 치료해주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바닷가로 나간 목적은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중풍병자로 인해 중단된 말씀을, 계속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제 예수님은 탁 트인 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은 그 날의 가르침을 끝내고, 바닷가를 떠나, 큰길로 나왔다. 그때 가버나움의 세관에, 레위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다.
당시 세리들은, 사탄의 무리로 여겼다. 그런데 세리를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로마인은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입찰에 부쳐서, 가장 많은 액수를 적어낸 사람이, 세금 징수권을 따냈다. 그래서 세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야 했다.
세관에 앉은 세리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품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돈이 될 만한 물품에는 빠짐없이 세금을 부과했다. 만일 세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하면, 비싼 이자를 물게 했고, 고리대금업까지 곁들여 했다. 세금을 내야 할 사람이, 내지 않으면, 주먹을 쓰는 폭력배를 동원하여, 꼭 받아냈다.
그들은 피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더럽고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예루살렘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마을에 있는 회당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눅18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해야 했다.
또한 법정에서 증인으로, 세움을 받지도 못했다. 레위는 바로 이러한 세리였다. 말하자면 그 당시, 죄인들 중의 죄인, 곧 가장 질이 나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레위를 향하여,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했으니, 얼마나 충격적인가?
예수님이 왜 레위를 불렀는지에 대한 설명이, 본문에는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요2:2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다 알기에, 예수님은 레위의 마음을 보고, 그를 불러 제자 삼았을 것이다. 레위는 예수님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행한 이적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주었다. 또 예수님이 전파하는, 복음에 대해서도, 다 들었을 것이다. 주님은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외쳤기에, 자연히 레위도 듣고, 마음 속에는 깊은 번민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는 돈에, 영혼을 팔은 사람이다. 돈 때문에, 동족을 배반했다. 하나님의 율법도 버렸다.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뒤, 레위의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영적으로, 너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자신의, 무거운 죄 짐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5:3-4) 자신의 죄를, 애통하게 여기면서,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죄 사함 받기를 원했다.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와 같은 레위의 마음을, 예수님이 보고, 레위를 불러, 그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이다.
레위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가 취했던 반응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이는 (눅18장)의, 한 부자 관원이 보여준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부자 관원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영적으로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눅5:28). 그러나 레위는 달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다. 이는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지금까지는 돈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를 주지 못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뒤를 따랐다. 레위 마태는, 일시적인 것들을 버리고, 영원한 것들을 얻었다.
물질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했다. 영원한 영광을 얻은 것이다. 레위는 세리, 죄인의 대명사였다. 세리는 창녀보다, 오히려 더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죄를 사하고, 그를 제자로 삼아서, 귀하게 썼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않는다. 나를 불러, 모든 더러운 죄를, 용서해주었다. 또한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귀하게 쓰임 받게 했다. 이 같은 은혜를 잊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하기를 바란다.
2. 세리의 집에서 벌인 큰 잔치(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그의 집’은 레위의 집이다. 레위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흘렀다. 이를 통해, 그가 그 동안 얼마나, 죄로 고통받았는지, 알 수 있다. 또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몹시 목말라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그의 죄를 사하여주었을 때, 너무 기뻐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앉았다’(아나케이마이)는 ‘기대어 눕다’는 뜻이다. 유대인은 간단한 식사를 들 때는, 식탁에 앉아서 먹지만, 만찬을 들 때는, 기대어 눕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서로, 환담을 나눴다. 레위 집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제자들 중에서, 레위가 제일가는 부자였을 것이다. 부자도 구원받고 천국갈 수 있다.
그 날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기대어 누웠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가버나움의 세관에는, 많은 세리가 있었다. 또 장부를 기록하는 사람, 짐을 들고 내리는 사람, 주먹 쓰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본문의 죄인들에 해당한다. 죄인들도 예수님을 따라, 레위의 집으로 왔다. 물론 그들은 레위처럼, 그들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서 그 곳으로 온 것뿐이다. 그렇지만 레위는, 그들도 그의 집으로 영접했다.
레위는 그들도, 예수님에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보여주어야 할, 참다운 모습이다. 죄인인 나를 살려준 것이, 예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은혜를, 우리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를, 기뻐하기 바란다.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었을 때, 속으로 예수님을, 신성 모독하는 자로 여겼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미행했다. 예수님을 정죄할 단서를, 찾기 위해서다. 예수님을 미행해서, 레위의 집 앞까지 왔는데, 그 곳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리들과, 이들과 함께 일하는 많은 죄인들이, 다 그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레위의 집안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지 않는 것을 복되게 여겼다(시1:1). 지금 레위의 집에는, 악인들과 죄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과, 아무 거리낌이 없이 함께 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잔치하는 집에 들어가, 예수님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잔치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집밖에서 계속 기다렸다. 예수님이 식사를 마치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때를 놓칠 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여기에서 ‘먹다’는, 삼인칭 단수다. 그러니까 지금, 비방하는 대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었을 때는, 속으로만, 예수님을 비난했다. 그러라 이제는 말로서, 예수님을 비방했다.
아직까지 그들이 예수님에게, 직접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갈수록 기세가 점점 거세져 갔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심하게 정죄했다. 아예 상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죄가 없는 분이지만,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했다.
언제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바랐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았다.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주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쉽게 우리 이웃을 정죄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이웃이 바라는 바는, 우리의 비방이나, 책망이 아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위로와 도움과 사랑이다. 큰 잔치를 열어서, 그들을 초청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비방이나 책망으로 정죄하지 말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늘 이웃을 긍휼히 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죄인을 부르러 온 예수님(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소리였다. 따라서 이 때,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말을 들고, 그 이유를 2가지로 말씀했다.
(1) 예수님은 하나의 격언을 들어서, 말씀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이 말씀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의사는 병든 사람에게 가야 한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병든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병든 자들의 곁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의 병을 고쳐준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이다. 그들에게는 영적 의사인 예수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했다.
반면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롭게 여겼다. 영적으로, 건강한 자라고 자처했다. 그래서 영적 의사인 예수님을,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영적으로 병들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죄만 할뿐, 도움이 되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너무 완악했다.
(2)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말씀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천국에 계셔야 할 분이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우리를 영화롭고, 영원한 천국으로, 부르려고 왔다.
그런데도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스로 높이면서 의롭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우리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태도를 버리자.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레위가 벌인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천국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영원히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만 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기에, 자기가 죄인인 줄 깨닫는 사람만, 예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고, 귀하게 사용하고, 천국으로 불러준다. 레위는 세리, 죄인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아울러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레위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조용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레위는, 늘 예수님이 기뻐하는 일에 힘썼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마자, 제일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레위는, 예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하게 살펴서, 그것을 담은 복음서, 곧 마태복음을 기록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백성에게 널리 전하고자 했다. 성경은 죄를 칭찬하거나, 죄를 두둔하지 않는다.
죄는 멸망의 원인이며, 심판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장 무서운 병은 죄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죄의 형벌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마8:12),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막9:48), 풀무 불에 던져져(마13:42),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며, 이를 갈며 슬피 운다(25:30).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부르는데,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나아가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이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은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사람이다. 우리도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며, 죄를 사하여주며, 구원하고, 귀하게 쓴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진심으로 감사하기 바란다. 예수님을 높이며, 기쁘게 하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늘 헌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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