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7월 22일 - 죄사함의 권세와 증명(막2:6-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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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의 권세와 증명(막2:6-12)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채,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줌으로, 예수님에게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1. 예수님을 비난하는 서기관들(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들)에 생각하기를.” 당시의 유대교는, 크게 4개의 파로 나누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파, 각 파마다, 그 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서기관들이 있었다.
서기관들은 각 교단 신학교교수,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눅5:16)을 보면 그 자리에는 서기관들 외에, 바리새인들이 함께 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서기관은, 바리새파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왔는데, 예수님이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말씀했다.
따라서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님에게, 결정적인 잘못을 찾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유대교에서 가장 큰 죄는, 신성 모독이었다.
신성모독에는, 크게 3가지다. ①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행20장)을 보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이 죄목을 덮어씌우려고 했다. ②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보다, 더 나쁜 신성 모독이다. 여기에 대한 실례가 (레24장)에 등장한다.
③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아예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악의 신성 모독이었다.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이 죄목을 예수님에게, 덮어씌우고자 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최악의 신성 모독으로, 책잡았던 근거는 무엇인가? 신성모독이었다.
(7中)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주장처럼, 제사장도 선지자도 죄를 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능히 죄를 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결론은 정해졌다.
(레24: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따라서 예수님을 신성모독 하는 자로 결론을 내리고, 죽이기로 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행하는 이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이 문제를,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어, 이적을 행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하는 것처럼 꾸며서, 로마인들의 손으로, 죽이게 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수님이 신성모독 하는 자인가? 하나님인가? 만일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없는데도,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했다면, 이는 분명히 신성 모독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임이 분명하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능히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 무슬림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 선지자며 메시아로 믿는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어떻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는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격자라고 말한다. 그 어떤 사람보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거짓말 하는 자고, 성경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2.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는 예수님(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 알았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물었다.
“어찌하여 이것(들)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이것’은 헬라어로 복수형이다. 서기관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율법이 명한 바에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을 전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다 아셨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삼상16:7下)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왕상8:39下)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대상28:9中)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이와 같이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다 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까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얼마든지 감출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참 모습을 본다. 이무리 변장을 잘해도, 그 실체가 드러난다(시139:1-12).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마음에 있는, 소원을 다 알았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바도, 다 알았다. 따라서 이것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일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서기관들의 생각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겠는가?
“너희가 내 말을 오해하였구나. 내 말의 뜻은, 내가 그의 죄를 사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하여주셨다는 뜻이니라.” 아마도 이와 같은 식으로, 변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자신의 말을 증명해야 한다.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래서 예수님은, 곧 이어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물었다.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인가? 지금 예수님은, 두 가지 가운데, 더 쉬운 일을 묻고 계신 것이 아니다.
죄를 사하는 일이나, 이적으로 병을 고치는 일이나, 사람에게는 똑같이 다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다 쉬운 일이다. 예수님은, 두 가지 가운데서 말하기, 쉬운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말이 더 쉽겠는가?
당연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쉬울 것이다. 이는 신성모독 하는 자도, 얼마든지 말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금방 진위가, 가려질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그만큼, 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의도는, 서기관들의 생각에, 말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일을, 행할 것이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에, 말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일도, 역시 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만일 예수님이, 인간의 질병만 기적으로 고치고,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은 ‘의사’일 뿐이지 ‘구세주’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이 땅에 온 분이다. (막2:17下)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또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알고서, 성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몰랐기에, 정당한 권한을 행사한 예수님을, 정죄했다. 이처럼 예수님을 모르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도, 비진리적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이다.
3.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예수님(10-11).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여기에서 ‘인자’는 예수님을 말한다. ‘너희’는 서기관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서기관들에게 보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세 가지를 명했다. ① ‘일어나’ ② ‘네 상을 가지고’ ③ ‘집으로 가라’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았을 때, 나병환자는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중풍을 앓았는지 모른다. 그는 남들이 부축한다고 해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전혀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오랫동안, 중풍을 앓아왔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의 팔과 다리는, 마비된 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다. 피부는 쪼그라들었고, 힘줄도 퇴화했을 것이다. 혈관도 오그라들고, 뼈도 많이 약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뇌 기능도 많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했다. 그의 힘으로 일어나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손으로 상을 들라고 명했다. 그의 집이 얼마나 먼지 모르지만, 그의 집까지, 그의 두 발로 걸어가라고 명했다.
이러한 것들을 행하려면, 먼저 중풍병자의 몸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했다. 그의 피부를 비롯해서, 힘줄, 혈관, 뼈, 그리고 뇌 세포까지, 다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했다. 물론 이러한 창조의 역사는, 우리의 몸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명했다.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중풍병자는 완전히 중풍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명령한 그대로 행했다. 그는 일어났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상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집을 향하여, 자기 발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그의 몸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창조의 역사는, 우리 몸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 때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창조의 이적을 행한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다 아는 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부분에,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의 반응이 나온다. 그들은 모두 다 놀랐다. 그들은 그제야, 나음을 입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볼 수 없던 기이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반응은, 이것이 전부였다.
(마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예수님은 사람일뿐이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창조의 역사를 행할 수 있고, 아니 어떻게 사람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이적을 통해,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기 위함이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중풍병자와 같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긍휼을,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할 것이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들도, 해결해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하늘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러한 풍성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늘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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