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7월 15일 -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권세(막2:1-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7-15 |
첨부파일: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권세.hwp(21K) |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권세(막2:1-5)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채,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었다. 그들의 믿음을 보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다. 그 결과 일어나서, 그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자기의 발로 걸어,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의 중심내용이 아니라, 다른데 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줌으로,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이 핵심 내용이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분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기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한 분이기에, 우리 죄를 용서해주기를 기뻐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닫고,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힘 있게 의지하기를 바란다.
1. 주님이 계신다는 소문(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그 동안 예수님은 여러 날을 가버나움에서, 떠나 있었다(막1:39).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며, 각 마을에 있는 회당에서 전도했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았다. 어느 날,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깨끗이 해주었다. 예수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가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다.
(1:45) 그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했다.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 이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예수님께 몰려왔기 때문이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을 수 있는 비결은, 소문을 잘 내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 일이 지났다. 예수님은 오랜만에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다. 몰려오던 사람들도, 다소 주춤해졌을 때, 들어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금방 퍼져나갔다. 이적을 행한 예수님을 보면,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이 집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 만큼 컸고, 또한 기와가 얹혀 있었다(눅5:19). 꽤 부유한 집으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의 집이었을 것이다. 일전에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사겸사해서, 시몬의 집에 계셨을 것이다.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모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든지,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문의 안쪽은 물론, 없고, 바깥쪽까지도,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몰려왔다고, 예수님의 사역이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 행하는 이적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고쳐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지장을 줄 때가 많았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은, 배를 띄우고, 그 위 앉아서, 그들을 가르쳐야 했다. 본문에서도 중풍병자의 돌발적인 등장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지장을 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무리가 떠나가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깊은 영적 진리를 전할 수 있었다. 지금 예수님에게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이 행하는 이적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말씀했다.
‘도’(로고스)다. ‘말씀’이라는 단어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의 도, 십자가의 도(고전1:18)이기 때문이다. 버나움 집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쳤을 것이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구약성경 (사6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 사람에게, 이 말씀을 읽고 가르쳤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을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로 간주함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이 그들을 죄인처럼 취급하니까, 몹시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다(눅4:29). 이 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가버나움으로 와서 살았다(마4:13). 그 때부터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불렸다(마9:1).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에게 전하며 가르쳤던, 똑같은 말씀을, 가버나움 사람에게도 전하며 가르쳤다. 다행히 가버나움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들처럼 끔찍하고도, 무지막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주님을, 구주로 주님으로 믿고 있는가? 어떤 동기로, 예수님께 나아왔는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육적인 일에만 관심을 쏟지는 않는가? 그러면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오히려 지장이 될 수 있다. 나사렛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에 귀를 막을 만큼,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베푸는 은혜를 받지 못하며, 구원 얻을 기회도,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자. 이것이 영적인 일에, 힘쓰는 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이다.
2. 포기하지 않는 믿음(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이 중풍병자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중한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가 누워 있는 채로, 네 사람이 그의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 나왔다. 침상에 누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중환자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까짓 목숨 살아서 무엇 하나,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도, 그가 중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그를 침상에 눕힌 채로,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갔다. 따라서 우리도,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오기 바란다.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중풍병자를 데리고서, 예수님께 온다는 사실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되는 중환자다.
그 환자를 침상에 눕힌 채, 몸의 균형을 잡아가면서,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가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왔는데,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다. 도저히 군중을 뚫고서,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애원해보았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길을 조금만 내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포기하지를 않았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당시 집들은 단층이었다. 집밖에 계단이 있어서, 그 계단을 통하여,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들고서, 힘들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당시 집들의 지붕은 평평했다. 지붕을 만드는 방법은, 먼저 들보와 서까래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나무 가지나, 짚을 깔았다. 그 사이를 진흙으로 채워서, 단단하게 한다. 그런 후에 형편이 괜찮은 집은, 그 위에 기와를 놓았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위치를 찾아야했다. 만일 엉뚱한 데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확한 자리를 정한 후에, 그 곳의 기와를 벗겼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 그 곳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지붕에서 무슨 소리가 있더니, 그들 위로 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지붕에 자그마한 구멍 하나가, 뚫리는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 구멍은 점차, 커졌다. 저러다가는 지붕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라는, 우려가 들었다. 잠시 후에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상이, 예수님이 계신 곳 앞으로 내려왔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밑에 있는 사람들의 비난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분위기가, 얼마나 산만했겠는가? 자연히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 중풍병자를 향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그 중풍병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쏠렸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아보기 바란다. 동쪽이 막혔으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도 막혔다면, 남쪽으로 가 보고, 남쪽도 막혔으면 북쪽도 있지 않는가? 동서남북이 다 막혔어도, 포기하지 말고, 위로 올라가기 바란다.
수평적인 길만 찾지 말고, 수직적인 길을 찾아보라. 위에서 아래로 뚫린 길이 있다. 바닷길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길, 예수님과 통하는 길이 있다. 1831년에 사업을 시작했지만, 곧 실패했다. 1832년에는 주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다. 1833년에는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댔지만, 또 다시 실패했다.
1834년에 다행히,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35년에는 그가 사랑하던 애인이 죽었다. 1836년에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졌다. 1838년에는 주 하원의장에 입후보했다, 쓴잔을 마셨다. 1840년에는 선거인단에 출마했다가 패배했다. 1843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다.
1846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48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재출마했다가 또 낙선했다. 1856년에는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다. 1858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또 다시 출마했다가, 역시 낙선되었다. 1860년에는 당당히,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 그가 바로 링컨 대통령이다.
3. 죄 사함을 선포한 예수님(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그들은 예수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풍병자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중풍에 걸리면, 말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붕 위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주님께서 그를 고쳐주실 줄을 믿고, 그를 주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중풍병자의 병을, 낫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아니면 그들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9장) 말씀처럼, 그 당시에는 죄 때문에, 병에 걸린다고 여겼다. 따라서 중풍병자는, 그의 병든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가, 싫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께 온 것은, 예수님이 반드시 그의 병을 고쳐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를 데리고 왔던, 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힘들게 지붕 위로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붕 값을 물어낼 생각을 하고서라도, 지붕을 뜯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반드시, 그를 고쳐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는, 오로지 중풍병자 한 사람에게만 말씀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이유는, 다른 네 명에게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고쳐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고쳐 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지만, 그것보다도 그가 마음으로, 더 절실하게 바라던 것이, 따로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안다(요2:25). 그 중풍병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아셨다.
그것은 자기의 죄를, 사함 받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바라는 바를, 그대로 들어주었다. 네 사람들은 건강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비참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그의 외적 비참함을 통하여, 그의 내적 비참함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 네 명은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만 믿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병을 고치는 능력만 아니라,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권세도 믿고 나왔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했다.
이제 그는 죄 사함을 받았다. 그는 거듭났다. 구원받았다. 이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 그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완전히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작은 자”(테크논)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아이’ 또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예수님이 그를 무시해서, 부르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멸망의 자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이가 된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가 없다.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막2:17).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하고 평안하다고 해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믿지 말자. 세리처럼 모든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자.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는 하나님이다. 죄를 사해주는 주님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18년 7월 8일 - 순종이 중요한 이유(막1:43-45) | |
다음글 : 2018년 7월 22일 - 죄사함의 권세와 증명(막2:6-12)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