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7월 1일 -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예수님(막1:40-4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7-01 |
첨부파일: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예수님.hwp(20K) |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예수님(막1:40-42)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내용이다. 나병은 옛날에는, 문둥병이라고 했다. 나병 병원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금은 ‘한센’병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 미라에서도 발견될 만큼, 나병은 아주 오래된 질병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엔, 나병환자가 많았다.
(눅4:27上)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했다.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환자들이 많았다. 몸의 감각을 마비시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무섭고 치명적인 병이다. 더 심하면 눈썹, 손톱, 발톱, 이빨도 다 빠진다. 코와 귀, 눈도 상하고, 목소리도 상한다.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성한 사람이 가까이 오면,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서, 자기가 나병환자임을 드러내야 했다(레13:45). 같이 사는 가족도, 일터도, 소망도 다 잃어버리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
의술이 발달한 오늘에도, 나병은 완전히 고칠 수 없다. 무너진 신체는, 결코 원상태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나병은 ‘메쪼라트’인데, 짜라아에서 나왔다. “때려눕히다, 벌주다, 채찍질하다.”등으로, 하나님이 때려눕힌 병으로, 동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병은 하나님이 벌을 내린 병으로, 사형선고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다. 병들기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완전히 회복시켜주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밝히 보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더 분명하게 알고, 믿음을, 더 확실히 갖기를 바란다.
1. 예수님에게 나아온 나병환자(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여기 나오는 나병환자는, 초기단계를 앓는 사람이 아니었다.
(눅5:12中)을 보면,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었다. 누가는 의사이니, 좀 더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그의 상태를 기록했다. 남에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중한 환자니, 이미 그의 얼굴도, 흉하게 일그러졌고, 몸에서 냄새도 났을 것이다. 그는 성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결코 나올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는 놀랍게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처럼(눅17장),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왔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나아온 나병환자가 보여준 자세에서, 5가지 두드러진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자세다.
① ‘예수께 와서’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 그는 다 잃었다. 건강도, 가족과, 친구도, 사회생활도 잃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그는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각종 질병을 다 고쳐준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그를, 깨끗이 해주는 길뿐이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② ‘꿇어 엎드려’ 그는 예수님에게 경배했다. 무릎을 꿇고, 자기의 얼굴을 땅에 대었다.
(마8:2)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 절했다. 성경에서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할 때만, 취하는 자세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경배했다. 나병환자의 태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다른 병자를 고쳐준 것을, 먼 곳에서 목격했거나, 타인들의 말을 통해, 예수님이 치유해준 소식을, 들고, 자기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③ ‘간구하여 이르되’ 그는 예수님께 긍휼을 간구했다. 이때 흐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나병을 앓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온 몸에 나병이 퍼졌으니, 오랫동안 나병을 앓아왔고, 그 동안에 그가 받은 서러움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는 애통하는 심정으로 흐느끼면서, 아니 엉엉 울면서,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고,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④ ‘원하시면’ 그는 예수님의 뜻에 맡겼다. “왜 내가 이와 같이, 몹쓸 병에 걸려야만 합니까?”하면서, 예수님에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면서, 예수님께 자기를, 깨끗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았다.
‘원하시면.’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뜻에 맡겼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원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에게, 떼를 쓰지도 아니할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었기에, 예수님에게 나아올 때, 예수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왔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나병의 경우에 성경은 “고치다, 낫게 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언제나 “깨끗하게 하다”라는 표현만 사용한다. (레13-14장)은 나병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나병 이외에, 다른 피부병들도 나온다. 다른 피부병들은 부정하지는 않기에, 나병환자들처럼 격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병은 부정하기에, 반드시 격리되어야 하기에, 나병이 무섭다. 깨끗함을 얻어야만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기에 성경은, 나병을 가리켜, 언제나 “깨끗함을 얻었다”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에게 나아올 때와 같이, 나병환자와 같은 자세로 나아가자.
2.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겨, 손을 대신 예수님(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겼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동기며, 이유이다.
물론 그는 바람직한 자세로,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한 이유는, 그를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보면서, 그가 겪어 왔을 고통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알았기에,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풀었다.
진실로 예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또 인자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어떤 식으로 깨끗하게 했나? 먼저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댔다(합토마이, 합토의 중간태). ‘(스스로) 대다, 묶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의 병을, 짊어졌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찾아온 일을, 책망하지 않았다. 율법의 정신, 긍휼과 자비를 따라, 질병을 짊어졌다. 나병환자의 부정을, 예수님이 짊어졌다. 율법을 어기고, 기꺼이 그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만졌다.
(레5:3)에 의하면, 나병환자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나병환자는 부정하기에,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도 더러워진다. 같이 부정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댔다. (눅4:40)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 위에, 일일이 손을 얹으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댄 일은, 유대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상태가 되었는데, 이를 재결합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댄 것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예수님과의 결합으로, 깨끗하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버림받은 것으로 건주된 자이며, 하나님의 전에 나올 수 없는 자였다. 그리고 그와 접한 자도, 불결함에 감염된 것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댄 것은, 예수님 우리의 죄를 짊어짐으로, 스스로 불결한 자로, 되었다는 말이다.
하와이 군도에, 몰로카이라는 섬이 있는데, 많은 나병환자들이, 그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다미엔은 그들에게 줄 구호물자를 많이 가지고, 그 섬으로 들어갔다. 나병환자들은, 다미엔을 거부했다. 다미엔은 그들과 서로 다른 처지이니,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미엔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저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는, 저도 저들과 똑같이 나병환자가 되어야겠으니, 제게 나병을 허락해 주세요." 드디어 다미엔도, 나병환자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곳에 있던 나병환자들은,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은, 믿음대로 나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믿음으로, 찾아 나온 사람을, 결코 거부하거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 나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항상 최선의 것으로 갚아 주었다.
그러므로 이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을 찾아가, 힘들고 어려울 때, 때를 따라 필요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예수님의 입에서, 치유가 선포되는 순간, 그 환자는 정상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며,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나병환자와 같다. 겉으로는 신사인 듯 보이지만, 모두 나병에 걸려 있는 모습이다. (롬3: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찬사를 보내도, 여전히 나병증세의 죄인이다. 이 세상에는 치료약이 없다. 예수님이 와서, 불쌍히 여기고, 손을 댈 때만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병환자가 아니다. 깨끗함을 얻었다. 예수님은 손을 나병환자에게 댈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무뚝뚝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말씀하면서, 그의 간구대로 응답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간구했다. ‘원하시면.’이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라고 했다. 나병환자는 또 간구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응답했다.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다.
3.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한 예수님(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는 예수님이 행한, 이적의 결과다. 맨 앞에 ‘곧’ 예수님은 언제나, 즉시 병을 낫게 한다.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나병은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한다. 마지막 부분에 “깨끗하여진지라” 말씀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병을 완전히 낫게 한다. 따라서 그의 빠졌던 눈썹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도, 곱게 펴졌을 것이다.
문드러진 코나 귀도, 새롭게 돋아났을 것이다. 그는 나병을 앓기 전의, 성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그는 깨끗하여졌다. 그러기에 그는, 더 이상 격리되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 동안 나병으로 인해서, 잃었던 가족, 친구, 사회생활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겼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해서, 그를 깨끗하게 했다. 이제 가족들의 품으로 되돌아가서, 이전처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고, 손을 댈 때만, 인류의 구원이 시작된다. 아담이 상실한 낙원 회복은, 예수님의 거룩한 손만이 가능하다.
얼마나 위대하고,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가? 이 은혜와 구속을 잊어버리고, 단순하게 사회개혁, 인류의 공동선 추구 등, 구호만 외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예수님과 연합될 때, 깨끗하게 될 수 있다. 사랑과 은혜의 주님을 만나자.
결론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다. 인생의 문제를 예수님 앞에, 다 가지고 나오기 바란다. 가지고 나오되, 주님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간구하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믿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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