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 6월 10일 - 병을 낫게 한 예수님(막1:29-31)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8-06-10 |
첨부파일: 병을 낫게 한 예수님.hwp(22K) |
병을 낫게 한 예수님(막1:29-31)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또 귀신을 쫓아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병을 낫게 한다. 이는 예수님의 3대 사역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영혼과 육을 동시에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밝히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구원해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1. 병을 고쳐준 장소(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쳤다. 그때 더러운 귀신은, 정체를 드러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회당(쉬나고게)는 유대인들의 집회장소를 말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회당이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유대인의 모든 종교활동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심판했다.
주전 586년,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 그 때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회당이 처음 생겨났다. 안식일이 되면, 그들은 바벨론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했다.
이 때 모여서, 예배드리던 곳을, 회당이라고 불렀다. 그 뒤에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때 회당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회당을 세웠다.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나서도, 계속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평일이면 회당을 학교로 사용했다.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장로들이 회당에 모여, 재판을 했다. 유대인들은 성인 남자들, 10명만 있으면, 회당을 세울 수 있었다(창18:32).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500개 정도의 회당들이 세워졌다. 성인 남자들, 열 명이 없을 경우에는 (행16:13)에 나오는 바와 같이, ‘기도할 곳’(기도처)을 정해서, 안식일에 함께 모일 수 있었다. 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에 위치한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도시였다.
그 곳에는 로마의 군인들이 주둔했고, 또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마태가,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던 곳이, 이 가버나움이었다. 그 당시 가버나움에도, 많은 회당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더러운 귀신도 쫓아냈다. 안식일의 집회는 대개, 그 날 정오에 끝난다.
안식일 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안식일 만찬을 든다. 이처럼 안식일 만찬을 함께 들기 위해, 시몬과 안드레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더불어 그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는, 벳새다 출신이었다(요1:44). 그 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서 계속 살지 않고, 갈릴릴 바다의 북서쪽에 있는, 큰 도시 가버나움으로 이사 왔다.
말하자면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이사 온 셈이다. 시몬은 결혼하면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왔는지, 어업에 종사했기에, 사업차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왔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다.
(마11:23-24)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지금의 가버나움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그 터만 남아있다. 그 곳에서 해변 쪽으로, 일분 정도 걸어가면, 이른바 베드로의 집이 나온다. 오늘날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 곳에서 예수님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의 잔해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그 잔해 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는 글들이, 많이 적혀 있어서, 그 집을 베드로의 집이라고, 결론을 짓게 되었다. 아무튼 그 집에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 시몬의 동생 안드레도, 함께 살았다.
그리고 시몬의 장모도, 함께 살았다. 지금 베드로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은, 여러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집터가 아주 넓고, 건물도 상당히 크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품꾼이 아니었다.
또 그들은, 기껏 낚시나 던져서, 하루에 몇 마리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었다.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이처럼 시몬은, 자기의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형제 안드레와,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말하자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 정도로, 가난한 어부들이 아니었다. 어업에 종사하면서,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직장도, 돈도, 다 버렸다.
예수님은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했다(17).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되리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잘 깨달았다. 자신들의 배보다도, 그물보다도, 또한 잡은 물고기들보다도, 사람의 영혼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배도, 그물도, 모든 다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가진 배와 그물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결국은 다 버려두고 떠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로 인하여, 구원 얻은 영혼은,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하늘나라에 살게 될 것이다.
인생에 예수님을 위한 지리를, 마련해 두는 자가, 복이 있는 자다. 우리가 천국에서, 우리로 인하여 구원받은 영혼을, 보게 되는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구원의 기쁨은 영원하다. 따라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늘 힘쓰기를 바란다.
2.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안식일에 예배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의 초대를 받고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그들의 집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에 대해 말했다. 베드로의 히브리어 본명은 시몬이다. 예수님은 바위를 뜻하는, 아람어 게바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베드로다(요1:42).
시몬 베드로는, 독신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했기에, 아내가 있었다. 자녀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전도여행을 다닐 때, 자기 아내를 함께 데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고전9:5).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갔을 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퓌렛수사, 퓌렛소의 현재 분사)으로 누워 있었다.
지금 예수님을 비롯한, 귀한 손님들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병이 중했다. 게다가 본문에 사용된 ‘누워있다’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이다. 헬라어에서 미완료형은, 계속되는 동작을 뜻할 때, 사용하는 시제다.
즉 시몬의 장모는, 이미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만큼 만성적인 병이었다. 시몬의 장모가 앓은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고 있다. 단지 그가 앓고 있는, 증세만 나타날 뿐이다. 그는 열병을 앓았다.
하지만 의사인 누가는 ‘퓌레토 메갈로’ 고온이 동반되는 ‘중한 열병’(눅4:38中)이라 했다. 유대인들은 이 병을 ‘불’ 또는, 뼈 속의 불’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만큼 높은 열을 동반하는, 심각한 병으로 습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인근 지역에 흔한, 풍토병이었을 것이다.
시몬의 아내는, 병든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시몬도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또 시몬의 자녀들도, 할머니가 얼른 낫기를 바랐을 것이다. 함께 사는 안드레도, 또한 그 자리에 함께 한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걱정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시몬의 장모가 병 낫기를 바랐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그가 열병으로 누워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눅4:38)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시몬의 장모의 병을, 고쳐주기를 구했다. 예수님께 말했다. 왜? 예수님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내쫓았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분명하게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한 열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기를, 예수님에게 구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동안, 많은 병자를 고쳤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도, 다시 살렸다. 예수님에게는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이나, 똑같이 쉬운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창조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죽은 자들도 다시 살렸는가? 그들이 더 이상, 병들거나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라고, 그렇게 했나? 결코 그렇지 않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타락한 결과, 누구나 다 죽도록 정해졌다(히9:27).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했기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단지 두 사람, 곧 (창5장)에 나오는 에녹과, (왕하2장)에 나오는 엘리야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다. 그 외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죽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린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함을 얻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의 몸으로, 영원히 살지 않는다.
우리 몸은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에(빌3:20), 하늘로 돌아간다. 우리 몸은, 곧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몸으로, 계속 사는 것이 아니다. 영광의 몸으로 변하여, 영원히 산다(빌3:21).
우리의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림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할 것을 밝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영광의 몸으로, 변할 것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있게 의지하자.
3. 병든 시몬의 장모를 고쳐준 예수님(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은 단수다. 예수님은 한쪽 손을 잡아주었다.
예수님은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있던 그녀를, 측은히 여겼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잡은 손으로, 시몬의 장모를 일으켰다. (눅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었다. (25中)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시몬의 집에서 열병을 꾸짖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했을 것이다.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귀신을 꾸짖음으로, 영의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가 있음을 보였다. 열병을 꾸짖음으로, 육의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가 있음을 보였다.
바람과 물결을 꾸짖음으로, 예수님은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가 있음을 보였다.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우리 영과 육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린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으며, 명할 때, 열병은 예수님의 명에 순종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눅4:39中) “…여자가 곧 일어나.’라고 했다. 시몬의 장모가, 얼마나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으며, 그를 일으킬 때, 열병이 떠남과 동시에 그는 그 즉시 병상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고 나면, 기운이 진해서, 몸이 많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병이 낫더라도, 한 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는, 열병이 떠나자마자,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군다나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미완료) 다른 사람들이 수종을 든 것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종을 들었다. 순간적으로 완전하게 고쳐준 것이다.
시몬의 장모에게는, 회복의 기간이 전연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 아팠는가 하는 듯이, 이전의 건강한 몸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계속 수종들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신약성경의 네 권의 복음서에는 90여 곳에서, 예수님이 각종 병을 고친 사실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① 예수님은 “말씀이나 손을 대어” 병을 고쳤다. 예수님은 열병을 꾸짖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켰다. 이처럼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손을 대심으로, 때로는 두 가지를 병행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했다.
② 예수님은 “즉시” 병을 낫게 했다. 시몬의 장모가, 서서히 기력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으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그 즉시,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언제나, 그 즉시 사람의 병을 낫게 했다.
③ 예수님은 “완전히” 병을 낫게 했다. 시몬의 장모는,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연 후유증이 없었다. 기력은 쇠하여지지 않았다. 어지러움도 없었다. 예수님이 그녀의 병을, 완전히 낫게 했기에, 그는 건강한 몸으로, 사람들에게 수종을 들었다. 또다시 재발하는 일도 없었다.
④ 예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했다. 예수님은 열병만 고친 것이 아니다.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라고 했다. 이는 같은 날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다 고쳤다. 예수님은 우리 몸을 창조한 하나님이기에,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다.
⑤ 예수님은 “조건 없이” 병을 고쳤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나?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기에, 유일한 해답이다.
우리 인생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을 위한 지리를 마련해 두는 자가, 복 있는 자다. 인생에는 많은 괴로움과, 문제들이 따른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 됨을,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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