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도 4월 1일 - 부활의 증거들 | |
작성자 : 이병진 | 작성일 : 2018-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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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거들(고전15:1-8)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은 성도가 될 수 없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 문제는 그들의 몸도,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는데 있었다(12). 그 이유는 당시 팽배했던, 헬라철학의 영향 때문이다. 바울은 헬라철학의 중심지,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곳의 철학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롱하며, 믿지 않기에, 바울은 그 곳을 떠났다(행17:32-33). 헬라철학은 이원론이다. 사람을 영과 육으로 구분했고, 영은 선하지만, 육은 악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몸의 부활, 즉 악한 육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악한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은 믿지 못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믿었지만, 우리 몸의 부활을, 잘못 이해했다. 우리 육체가 그대로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변화된 몸, 신령한 몸으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 이 사실을 부활장인 (고전15장)에서, 자세히 밝혔다.
우리 몸의 부활을 설명하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해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면, 우리 몸의 부활도, 마땅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부활의 믿음과, 부활의 소망이, 더욱 확고해지기를 바란다.
1.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형제들아!’는 애정 어린 표현이다.
(행8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 열매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말씀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바울이 과거에 고린도에 있었을 때,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음, 기쁘고도 복된 소식이 되나?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고, 아울러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이러한 복음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또 복음 가운데 섰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 가운데 서서, 복음을 굳게 지켰다. 아울러 복음을 계속 믿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 물론 그들 주변에는, 헛되이 믿은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믿는 듯하다가, 뒤에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구원 받았다가,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요일2:19) 말씀처럼, 그들은 애당초,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알곡이 아니라 쭉정이였다.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받고, 굳게 지키고, 진실 되게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 본시 (고전6:9-11) 말씀과 같이, 그들은 불의한 자,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들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누가 그들의 삶을 바꾸어놓았나?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살아 있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러니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증언하나?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이 살아 있어, 그들 가운데 역사했다. 이처럼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어 왔다. 이는 사탄이, 사람들의 구원을 막으려하는 짓이다.
그러나 지난 이천년 동안, 교회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부흥하면서 오늘까지, 계속 존재하고 있다. 교회는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 준 복음을 받아, 복음 가운데 있다. 아울러 교회는 복음을 굳게 지키며 복음을 믿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존재함이, 복음의 본질,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한다.
복음을 받아서, 복음 가운데 서며, 복음을 굳게 지키고, 믿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다.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변화된 삶을 통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백성에게, 분명히 증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2.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성경이 이미,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 또 성경대로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와 같이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내가 받은 것을’ 복음은 바울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받았을 뿐이다. 바울은 누구에게서, 복음을 받았는가? (갈1:11-12) 말씀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다. 예수님에게서 직접 받았다. (고전11:23)에서 바울은 성찬에 관한 말씀을 하면서도, 자신이 그 말씀을, 예수님에게서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아무튼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린도에서 전했다.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복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밝혔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간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다.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며, 십자가의 의미다.
아울러 예수님은, 장사 지낸 바 되었다. 무덤에 들어갔다. 잠시 정신을 잃고, 기절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말하자면 완전한 사망의 증거다. 그런데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장사 지낸 바 된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었다. 성경대로 된 것이었다.
성경, 곧 구약성경은,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할 것과, 장사 지낸 바 될 것을, 이미 자세히 말씀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했다. (사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이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보다, 칠백 년이나 앞서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고, 장사 지낸 바 될 것을 말씀했다. 따라서 성경대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
(4中)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의 복음을, 새롭게 만들어서, 전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말씀해놓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행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바울은 (행13: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시16:10) 말씀을 인용한 것이었다.
(막12:10)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예수님은 (시118:22) 말씀을 인용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아울러 (마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 때도 예수님은 성경을 들어서,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밝혔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성경대로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을 삶의 원리로 삼고, 성경대로 살기를 바란다.
3.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뿐만 아니라, 다시 사신 예수님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본문을 보면 ‘보이시다.’라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아무나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며, 자신을 보여야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몰라보았다. 또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본문 말씀처럼, 먼저 예수님은, 게바 곧 베드로에게 보이셨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심히 통곡했다. 아마 예수님은 상심에 빠진 베드로를 위로하기 위해, 먼저 그에게 보이셨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보였다.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부활한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가서(마28:10, 16), 제자들을 만났다. 아마 그 때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였다.
열두 제자가 양질의 증인이라면, 오백여 형제는, 다수의 증인이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약25년 정도 지나서,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다. 그 사이에 오백여 형제 중에 잠든 사람, 곧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살아 있어서, 얼마든지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확인해볼 수도 있었다.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여기서 말하는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었다. 이들은 둘 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처음에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7:5). 남들이 다 믿는데, 가족이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그래서 부활한 예수님은, 야고보에게 보였다. 그 후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어,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인 후에, 또 다시 모든 사도들에게 보였다.
부활한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였다(행1:3).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했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도 보였음을 증언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비방하며,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다.
(행9장)을 보면, 바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갔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님이 그에게 보였다. 그 때부터 바울은, 예수님에게 잡혀, 순교하는 날까지, 예수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했다. 해산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났다는 뜻이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가? 부활한 예수님이, 자기 같이 덜 되고, 부족한 사람에게 보인 것은 전적으로 은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와 같이 고백했다.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보이신 것도, 또한 그가 사도로서, 수고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확실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이다.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교리적으로 우리는, 부활 신앙 위에 견실하게 서서,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수고를 칭찬하며, 행한 대로, 상을 준다. 개, 고양이, 새도, 한번 구원받은 은혜를, 계속 잊지 않고, 다가와서 감사함을 표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ewaFB1dVM 개 감동의 재회 - 3, 5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개가 큰 통곡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잊고 살고, 배반하며 사는가?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서, 더욱 주를 위해 힘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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