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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년도 3월 25일 -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
  작성자 : 이병진 작성일 : 2018-04-15
  첨부파일: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hwp(23K)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11:1-1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종려나무를 흔들며 찬송했기에 종려주일이라 한다. 그 주 금요일, 십자가를 지고 죽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이다.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었다(3:6). 그러나 대적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3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피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의 일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이적을 행하여 피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밝히 드러낸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적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되, 명절인 유월절은 피하려고 했다(14:1-2).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임을 당해야 했다. 왜냐하면 유월절 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기에 사람들이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해서, 대적들의 증오심을 자극시켜, 그들이 하나님이 정한 때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었다.

1.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에서의 예수님(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 동쪽, 가까운 곳에 감람산, 올리브 산이 있다. 해발 약800M에 높은 곳이다.

감람산의 기슭에는, 벳바게(파게, 익지 않은 무화과의 집)와 베다니(아니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의 집)라는,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있다. 여리고에서 올라가면, 먼저 베다니가 나온다. 그 뒤에 벳바게를 지나서, 예루살렘에 도달하게 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 중에 둘을 보냈다.

(2-3)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이 때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셨다면, 예수님은 두 제자를, 벳바게로 보낸 셈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맞은편 마을로 가면, 나귀 새끼가 있는데, 매여 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았다고 했다. 절대 순결성을 말하며, 예수님은 현재만 아니라, 과거의 상황도 다 알고,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낯선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면, 온당하지 못하게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대답할 말을, 미리 가르쳐주었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예수님은 낱낱이 다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시공을 초월해서, 모두 다 알 수 있는 까닭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 어떤 형편과 문제가 있는지, 모두 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므로, 모든 문제에서 풀어주고, 귀하게 쓸 것이다.

(4-6)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두 제자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맞은편 마을로 갔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그 곳에는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다. 예수님이 지시한 대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었다. 그러자 거기 서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그들에게 물었다. (19: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였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대답했다.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더 이상의 질문도, 대답도, 필요 없었다. 나귀 새끼의 임자는, 두 제자가 자기들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분명 나귀 새끼의 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벳바게나 베다니나, 둘 다 작은 시골 동네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러니 서로의 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을, 깨끗하게 했다(14:3). 또한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그를 살려주었다.

그러니 베다니의 맞은편 마을, 벳바게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나귀 새끼를 예수님이 쓰겠다고 말했다. 나귀 새끼의 주인은, 그 일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귀 새끼를 기꺼이 내놓았던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이 말씀에 감격하여, 자신들의 나귀 새끼를 내놓았다. 어떤 이는 자기의 다락방을 내드렸다. 어떤 이는, 자기의 새 무덤을 내드렸다. 또한 어떤 이는, 자기의 옥합을 깨뜨렸다. 우리는 무엇을 내어드리겠는가? 찬송가 501절의 가사에 나오는, 신앙적인 고백과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2.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님(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예수님 말씀대로, 두 제자는 나귀 새끼를, 예수님에게 끌고 왔다.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자, 귀하게 사용되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결과,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이적이 일어났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을 드리면, 우리가 성전이 되어, 귀하게 사용되고, 영원히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된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기에, 그 위에 안장이, 얹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타기에 편하도록,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탄 이유가 무엇인가? 먼 길을, 그것도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걸어와서, 피곤을 느꼈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는 (21:4)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스가랴는 예수님보다, 오백 년 전의 사람이었다. (9:9)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왕인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갈 것을 말씀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지만, 세상의 왕들처럼, 멋있는 백마를 타지 않았다. 검을 차지도 않고, 군대를 이끌지도 않았다. 로마와 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탔다. 예수님이 다시 올 때는, 백마를 타고서 온다.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했다.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유월절을 맞이하여,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다. (12:9) 말씀과 같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계신 베다니로 모여들었다. 예수님도 보고,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보려 함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는 오랜 관습의 하나로 나를 밟고 지나가소서. 나는 왕에게 복종하겠나이다.”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런 뜻으로, 왕이 지나갈 때, 백성들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했다. 이미 예루살렘에 당도한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왔다(12:12-13). 그래서 종려주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종려나무는 ‘Phoenix, 포에닉스, 봉황으로, 불사조의 나무다.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에, 다시 싹이 나고 자란다. 따라서 승리와 부활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7:9-10)을 보면, 종려나무 가지는, 구원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베풀 구원의 기쁨을 생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폈다.

(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앞에서 가는 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 되어, 소리쳤다. (118:25-26)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호산나(호시아 나)이제 구원하소서’(118:25)라는 말이다. 구원을 간구하는 말씀이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불렀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메시아의 칭호다.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고서, 예수님을 찬송했다.

(14)을 보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네 발로 일어서라.’고 하자, 고침을 받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여기고, 제사 지내려고 했다. 그 때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옷을 찢으면서, 황급히 그들의 행위를 말렸다.

사람은 결코 경배를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찬송하며 경배함을, 전혀 금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찬송을, 그대로 받았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0절에서 그들의 찬송은, 이어진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이 자기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주기를 바랐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가장 높은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하면서, 구원해달라고 외쳤다.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었다. 예수님을 찬송했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줄 줄로 믿었다. 이 또한 옳았다. 그런데 며칠도 안 되어, 전혀 다르게 소리 질렀다.

(19: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또한(19:15)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왜 그들이, 갑자기 달라졌나? 예수님이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자, 예수님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때는 유월절이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에서 구원해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이 온 것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되어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고자 했다. 결국 그들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오셨는데, 예수님에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예수님을 버렸다. 영혼의 구원이 먼저다. 하나님과 화목이 우선이다. 그러면 다윗의 나라는 문제가 아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라고 기뻐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3.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드디어 예수님은,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그 때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다(21:10).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던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길로 로마를 무찌르고, 그들의 조상 다윗의 나라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잠잠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2). 그리고 성전 안에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보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로부터 삼년 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곳의 상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예수님은 또다시,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11:15). 그러나 본문과 같이, 날은 이미 저물었기에,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도, 장사를 끝내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다음날로 미루고,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떠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갔다. 그 곳에서 그 날 밤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을 환호하던 사람들은, 이미 다 자취를 감추었고, 불과 며칠 후, 성난 군중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들의 소리는 더 이상 호산나 찬송하리로다.”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르고, 자기들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격한 대상은, 로마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성전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바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다. 기복신앙이라 함은, 복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을 말한다. 기복신앙은 매우 위험하다. 기대에 어긋나면, 쉽게 믿음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가?

참 믿음을 갖기 바란다. 참 믿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 참 믿음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예수님을 존귀하게 한다. 참 믿음은, 육체의 욕심을 거부하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함에 순종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참 믿음의 본을 보였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기 바란다. 참 믿음의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령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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