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도 3월 11일 - 침례 요한의 삶 | |
작성자 : 이병진 | 작성일 : 2018-04-15 |
첨부파일: 침례 요한의 삶.hwp(23K) |
침례 요한의 삶(막1:6-8)
지난 말씀은, 왕이 행차할 곳에, 먼저 왕의 사자가 와서, 그 길을 준비해야 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왔기에, 왕의 사자가 먼저 이 땅에 와서, 왕의 길을 준비해야 했다. 그 역할을 한 사람이, 침례 요한이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2가지를 외쳤다.
①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쳤다(2). ‘주의 길’은 여호와의 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했다. ② 왕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외쳐야 했다(3). 죄악으로 굽은 그들의 마음을 회개하고, 곧게 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오늘 말씀은, 침례 요한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침례 요한의 삶은, 믿을 수 있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 검소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오직 예수님만 높이기를 원했다. 왕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1. 침례요한의 삶의 모습(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여기 침례 요한의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이방인들처럼, 먹고 입는 것이 아니었다(마6:31-32).
왕의 사자로서, 겸손하게 오직 왕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데, 전심전력을 했다. ‘낙타털’(트리카스 카멜루)로 만든 옷을 입었다. 낙타털로 짠 옷이라,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허리에 가죽으로 띠를 했다. 이러한 복장은, 거친 광야에서 생활하기에 적합했다.
낙타털은 질겨서, 잘 헤어지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살았던 요한에게는, 매우 경제적인 의복이었다. 요한의 의복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일치 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요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에 합당 모습이었다. 부드럽고 호화스러운 옷보다, 거친 옷이 훨씬 더, 메시지에 잘 맞았다.
침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여호와가 기억한다)가, 늦게 얻은, 외아들이기에,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화롭게 살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옷을 입고 지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털옷은 본래, 선지자들이 입는 옷이었다(슥13:4). 침례 요한은 선지자였다.
(왕하1:8中)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옷을 그대로 계승한다(왕하2:12-14). 요한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선지자이기에, 털옷을 입었다.
침례 요한이 먹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다. (레11:22)을 보면, 메뚜기는 곤충 중에서, 예외적으로 먹을 수가 있었다. 석청은 벌들이 돌이나, 나무 사이에 모아놓은, 야생 꿀을 의미한다. 광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꿀이었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꿀이 많았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꿀은 광야 바위틈이나, 바위 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신32:13). 삼손은 길을 가다가, 사자의 몸에 꿀이 있는 것을 보고 먹었다(삿14:8-9, 18 참조).
요나단도 전쟁을 하다가, 땅에 흐르는 꿀을 먹고, 기운을 회복했다(삼상14:25-26, 29). 침례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 천연음식(꿀과 석청)을 먹고 살았다. 침례 요한의 신발을, 언급되지 않음을 볼 때에, 맨 발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어려서부터 구별되어서, 독주나 소주를 마시는 일이 금지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눅1:15). 유대인은 나실인이 되면, 머리털을 밀지 않고 독주를 금했다. 침례 요한은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빈들(광야)에 있었다(눅1:80). 그는 어려서부터 광야의 은둔자로 살았다. 광야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그 당시의 타락한 종교와 문화와, 분리되어 살았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타락한 도시에서 분리되어, 엄격하게 양육 받을 필요가 있었다. 선지자에게 적합한,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자신을, 이기심과 방종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그의 검소한 삶은, 사치와 탐욕에 눈먼 사람들에게, 항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당시 종교인들은, 사치와 탐욕의 노예가 되어, 성직을 매매하고, 종교인의 본질에서 벗어난 행동들을 했다. 침례 요한의 의복과 음식은, 탐욕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검소한 삶을 보여준다.
침례 요한은 말과, 온 몸으로 메시지를 전했다(마3:7, 10, 12). 그의 검소한 삶은, 오늘 물질과 향락에 젖은 종교인들에게, 교훈을 준다.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메시지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지 않고,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왕인 예수님만 바라보며, 자신의 사명에만 충성했다. 그 결과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라는 칭찬을, 예수님에게서 받았다(마11:11).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다. 왕의 종이 전하는 메시지가 믿을만한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충성이다. 그렇게 살아서, 큰 칭찬을 받기를 바란다.
2.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알고 증언했다(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사람들은 침례 요한을, 능력 많은 이라고 여겼고, 또 그를 선지자로 여겼다.
(마21:26中)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또 (눅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더 나아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요한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며, 침례를 받았다.
침례 요한 당시의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암담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때는 정말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에, 침례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 선포했다.
회개한 사람들에게, 용서받은 표시로 침례를 베풀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소문은 온 유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 그의 길을 준비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었다.
침례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자기 뒤에 오실 것을, 분명하게 증언했다. 예수님에게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자기는 왕의 사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뒤에 오실, 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당시에 이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종은 몸을 굽혀서, 주인의 신발 끈을 풀고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겨드려야 했다. 그리고 물을 떠서, 주인의 발을 깨끗하게 씻겨드려야 했다. 자신의 사명과 분량을 알고,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단이 되고,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침례 요한은, 자신은 자기 뒤에 오는, 메시아의 종이 되어서, 수종들 자격도 없다는 말이다. 단순히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기 위해,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로 그는 왕 된 예수님을, 올바르게 증언했다. 예수님은 왕이다. 반면 침례 요한은, 왕의 사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이다. 반면에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만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 명성이 높아지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한다. 이는 거짓 선지자가 되어,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예수님은 후에, 침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다. (마11:14中)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왕의 사자로 오리라 했던, 선지자 엘리야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예언은 말라기서에 나온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물론 침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엘리야는 아니다.
이 말은 침례 요한의 삶과, 메시지와 사명이, 엘리야와 비슷함을 의미한다. 침례 요한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엘리야와 비슷했다. ① 갑작스러운 출현 ② 메시지의 내용과 성격 ③ 생활의 단순함과 소박함 ④ 맡은 사명 ⑤ 복장과 외모(왕하1:8).
엘리야는 사람들과 격리되어, 훈련을 받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의 마음이, 우상을 향하고 있던 아합 왕 때에,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잡아 죽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을 통해서, 우상에 미혹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불안으로 지쳐 있었고, 심령이 메말라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엘리야는 백성들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침례 요한은 왕인 메시아의 전령, 선구자로서 자기 사명을 이행했다. 다음과 같은 사역을, 성실히 수행했다.
①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고, 백성의 관심을 메시아로 돌림(요1:29). ② 죄인이 메시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회개)을 가르침(마3:2). ③ 예수님이 무대에 등장하자, 자신은 물러나야 한다고 선언함.(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이러한 모든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과 비슷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을 ‘신약의 엘리야’라고 부른다. (눅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침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했던 말씀이다. 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온 자였다. 따라서 그는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하고서, 선지자 엘리야가 사역했던, 바로 그 곳에서 사역을 했다.
3. 자신과 메시아가 베푸는 침례의 차이(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리라.” 침례 요한은 자신이 행하는 침례와, 뒤에 오는 메시아가 베풀, 침례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했다.
요한은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요단강에서 물로 침례를 베풀었다. 죄를 회개한 자에게, 용서의 표시로 행한 예식이었다. 회개한 사람들을 굳세게 하고, 계속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강화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침례 요한이 베푼 물 침례는, 바로 이러한 침례였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이 침례의 역할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겔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침례는 회개한 사람들이 죄를 떠나, 의롭게 살도록 촉구하고,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침례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의 역할은, 단지 백성들에게 회개의 절박함을, 깨우쳐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베푸는, 완전한 침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침례 요한은 뒤에 오는 메시아가,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라고 예고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에 대해 예언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고, 새로운 마음을 창조할 분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은혜를 수용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창조해 준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고 따른다. 이러한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루어졌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새로운 마음을 받게 되었고, 진리를 깨달았으며, 또 복음을 목숨을 걸고, 증언할 능력을 얻게 되었다. 베드로는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다.
(마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 주를 부인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나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매달릴 자격이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외쳤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야만 한다. 성령과 연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은, 불의 혀처럼 갈라져서, 그 방에 모인 사람들 위에 머물렀다(행2:3). 불은 불순물을 정결하게 하고, 어두운 곳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성령님은 불로 임해,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어두워진 우리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준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성령님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을 선포한다.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하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이 있음을 보여준다.
침례 요한은 어디까지나, 물로 침례를 베풀 뿐이다. 그는 성령으로, 침례를 베풀 수 없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 하나님이다. 그러니 사람인 침례 요한이, 하나님인 성령으로, 침례를 어찌 베풀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실 수 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이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증언했다. 왕의 사자 침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이며, 어떠한 일을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왕, 곧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푼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보좌에 모심으로,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그리해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되고, 침례 요한처럼, 우리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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