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도 3월 4일 - 왕의 사자 침례 요한 | |
작성자 : 이병진 | 작성일 : 2018-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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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자 침례 요한(막1:2-5)
지난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복음의 세상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보다 앞에 와서, 왕의 사자 역할을 한, 침례 요한을 소개한다.
마가는 로마인들을 위해 썼다. 황제는 행차할 때,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이, 오지 않았다. 먼저 왕의 사자가 행차할 곳으로, 왕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예수님은 왕으로 왔기에, 왕의 사자가 먼저 와서, 왕의 길을 준비해야 했다.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역할을 요한이 했다. 침례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했다. 침례 요한은 이제 구약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신약 시대를 열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선구자요, 전령이었다.
1. 침례 요한에 대한 예언(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이 말씀은, (말3:1)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에서 인용했다.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는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에서 인용되었다.
2절은 말라기서, 3절은 이사야서에서 인용되었는데, 두 말씀 모두가,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것처럼 썼지만, 전혀 이상하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언급할 경우, 일일이 밝히기가 번거로우면,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을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구약 성경(타나크)을 말한다.
구약 성경은, 율법(토라)과 선지서(느비임)와, 나머지 책들, 곧 성문서(카투빔)로 구분된다. 예수님은 성문서 전체를 시편이라고 했다. 시편이 성문서 전체의, 대표 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본문에는 말라기서의 말씀과, 이사야서의 말씀이 함께 인용되었지만, 이사야서만, 대표적으로 언급했다.
그 이유는 선지서 가운데, 이사야서가 가장 긴 책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2절에서 침례 요한을 ‘사자’로, 3절에는 ‘광야에 외치는 자’로 지칭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2절에 기록되었다. 왕인 예수님 앞에 선발대로 보냄을 받아, 왕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앞에’(프로소푸)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선발대를 앞서 보내 먼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알렸던 사실과 관련된 단어다. 따라서 침례 요한은, 메시아가 온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준비하게끔 하는 것으로, 국한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러면 침례 요한은, 무슨 일을 해야 했나? (2-3)절에는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2가지를 외쳐야했다. ① 그들에게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쳐야 했다(2). ‘주의 길’은 여호와의 길인데, 마가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② 왕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외쳐야 했다(3).
(사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기에 왕이 행차할 때, 왕의 사자가 했던 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왕의 사자는, 왕의 길을 점검해서, 장애가 될 요소들을, 모두 제거해야만 했다.
낮은 곳은 돋우고, 높은 곳은 낮추어서, 왕이 지나가기 좋도록, 모든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침례 요한은, 왕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왕의 사자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왕인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하라고 외쳤다. 교만한 마음을 낮춰라. 굽은 길을 곧게 하라.
죄악으로 굽은, 그들의 마음을 회개하고, 곧게 하라고 외쳤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자로 보냄을 받았다. 이는 침례 요한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왕 됨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수님이, 왕으로 강림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왕으로 강림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마가복음을 살펴보면서, 죄로 굽은 마음이, 점차 곧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왕인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왕인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왕인 예수님을 날로 닮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2. 침례 요한의 사역(4).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드디어 왕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왕의 사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는 침례 요한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침례를 베푸는 자 요한이었다. ‘요한’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이다.’는 말이다. (눅1장)에는, 요한의 출생기록이 나온다. 아버지는 ‘사가랴’였고,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다.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엘리사벳은 처음부터 잉태를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을 낳게 되었다.
당시에 요한은 이름이 흔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자로, 보냄을 받은 요한을, 다른 요한과 구별 짓기 위해, 침례 요한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왕의 사자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렀다. ‘광야에 외치는 자’로 예언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3).
(눅1:80)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빈들(광야)에서 살았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무엇을 외쳤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4)를 전파했다. 이것이 왕의 사자, 침례 요한이 해야 할 사역이었다. 사람들은 올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깨끗한 마음이 준비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회개해야만 했다. 구원의 첫 단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와서, 자기 죄를 회개한다는 의미로,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
본시 유대인들에게는, 정결예식(토호라, 카리스모스)이 있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었다. 밖에 나갔다 오면, 물을 뿌렸다. 이와 같은 정결 예식이,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침례 예식도 있었다.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침례 예식이 특별하게 행해졌다(미크베).
과거 이방인으로 살았던, 더러운 삶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한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 침례 예식을 행했다. 이와 같은 때에, 침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밮티스마 메타노이아스)를 전파했다. 이는 참 놀라운 일이었다.
말하자면 침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외쳤다. 침례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한 것은, 그가 임의로 한 것은 아니었다. (눅3:2中)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회개’(메타노이아)는 ‘메타노에오’에서 나왔다. ‘메타’(다르게) + ‘노에오’(생각하다.) = ‘다시 생각함’이라는 의미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이킨다는 의미다(슈브).
‘침례’(밥티스마)는 ‘담그다, 착색하다, 하나 되다.’(밥티조)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원칙적으로, 몸을 완전히 담그는 상태를 의미하며, ‘하나가 되어, 바꾸기 원하는 마음’을 말한다. 구약 성경에는, 부정한 자의 정결 예식으로서의, 씻음에 대한 언급은 나온다(레15:5-16).
그러나 ‘하나 되어, 바꾸기 원하는 마음’의, 침례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한해, 개종자를 물속에 담금으로써, 죄의 회개와 개종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진정한 침례는, 죄를 씻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나 되어, 바꾸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침례 요한을 따르는 자들 중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침례(행19:2-5)를 행한 자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 다시 침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정결함을 받기 위한, 문자대로 ‘회개의 침례(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다.
당시 유대교의 한 종파인, 쿰란 공동체는, 종말의 심판을 대비하기 위해, 매일 죄를 고백하며, 몸을 씻는 정결 의식을 행하였다. 죄로부터 돌아서겠다는 결단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유대인들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전했다.
(눅3:16中-17)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외쳤다. 침례 요한의 외침에, 유대인들의 마음은, 크게 찔렸다.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마음도 죄악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여 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바뀌고, 연합하기 원하는 마음은, 없었을 수도 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기만을 원하는, 침례를 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주님과 연합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침례를 받아야 옳다.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연합하기를 바란다.
3. 광야에서 외치는, 침례 요한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나?(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구원의 첫 단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다.
침례 요한의 말을 듣고,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침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회개의 침례를 요구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크게 네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을 유대라고 불렀다. 그 위쪽을 사마리아라고 불렀다. 제일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불렀다. 요단 강 동편을, 베뢰아라고 했다.
수도 예루살렘과, 그 인근 유대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을 찾아왔다. 그 곳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많았고, 또한 그 곳에서, 침례 요한의 사역지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침례 요한을 찾아왔을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나아가’(엨세포류에토)와 ‘침례를 받다.’(에밮티존토)는, 모두 미완료형이다. 이는 계속되는 동작을 뜻할 때, 사용되는 시제다. ‘온’(파사)과 ‘다’(판테스)라는 단어가 강조된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침례 요한에게 와서, 침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마3:7上)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눅3:12上)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눅3:14上)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이와 같이 그 당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다 침례 요한에게로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다.
자신들이 이방인인 것처럼, 그들은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대부분 피상적이었고, 위선적이었다. 침례 요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인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인 예수님이 왔다가 떠났을 때는, 마가의 다락방에는, 불과 백이십 명 정도만, 남았을 뿐이었다. 결과야 어떠했든지 간에, 침례 요한은 왕의 사자로서,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기의 사자로 보냄을 받은, 침례 요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운 칭찬을 했다.
(마11:11上)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하자면 침례 요한은, 아브라함보다도, 모세보다도, 다윗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이었다. 왕의 사자로서, 그가 해야 할 사명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다. 결과야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왕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준 일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해서 왕인 예수님께로부터,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우리는 진정,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침례 요한처럼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침례 요한처럼 소리가 되어, 예수님을 전하고 높이고 있는가? 혹시 교회에서 조금 봉사하고, 내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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