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8년도 2월 25일 - 복음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 |
작성자 : 이병진 | 작성일 : 2018-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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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1(막1:1)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제자이며, 동역자인 ‘마가’가 기록하였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베드로 곁에는 마가가 함께 있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해, 마가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흔히 마가복음을 ‘로마인을 위한 복음’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때(54-68년)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로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초기(54-59년)에는, 나라를 정상적으로 다스렸지만, 나중에는 폭정하기 시작했다.
네로의 통치기간인, 64년경에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 화재로, 로마 14개 행정구역들 가운데, 10개의 구역이 타버렸다. 그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이, 네로라는 소문이 돌자, 좋지 않은 여론과 비난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불을 냈다고, 뒤집어씌우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짐승 가죽들을 씌우고,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게 했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심지어 그들의 몸에 기름을 바르고, 불 붙인 후에, 인간횃불로 사용했다. 그때 베드로는 박해받는 성도들을, 격려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했다. 베드로는 로마 기독교인들을 위해, 글을 썼지만,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의 통역자로 일하던, 믿음의 아들 마가를 통해, 책을 썼다.
따라서 유대인의 풍습과, 용어를 잘 알지 못하는 로마인들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 씻는 일이나, 밖에 나갔다오면 물 뿌리는 일, 유월절에 양을 잡는 일 등에,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보아너게’(우레의 아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고르반’(하나님께 드렸다.) 등이다.
로마어도 사용했다. ‘레게온’(5:9, 군대), ‘시위병’(6:27) ‘데나리온’(12:15), ‘고드란트’(12:42) 등, 이러한 일은 마가복음의 독자가, 아람어를 모르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임을 말해주고, 마가복음에 사용된 시간 계산은, 로마식으로 계산했다(6:48, 13;35). 마태처럼 구약의 예언을,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면 마가복음의 주제는 바로 오늘 말씀이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에 나온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제이다. 마가복음 중앙에 “주는 그리스도시요”(막8:27)는 베드로의 고백이 나온다.
이 고백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의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을,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원어 성경에는, 순서가 완전히 반대다. 그러므로 원어성경의 순서에 따라 말씀을 드리겠다.
1. 복음의 시작(1下).
“…복음의 시작이라.” 원전 마가복음의 첫 단어는, ‘시작’(아르케)다. 이는 (창1:1과, 요1:1)의 첫 단어 ‘태초’와 똑같은 단어다. 이 시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밝히고 있다.
새 시대의 특징을, 복음이라고 했다. 고통과 슬픔의 시대가 지나가고, 좋은 시대, 기쁨과 즐거움의 새 시대가 열렸다. ‘복음’(유앙겔리온)은, ‘유’(좋다) + ‘앙겔리온’(소식)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복음이 좋은 소식임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은 구약 성경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그러면 당시 이방인들은,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나? 1906년 소아시아 ‘프리에네’에서, 헬라어로 쓰인 비문들이 발견되었다. BC 9년 예수님이 탄생하기 이전에, 쓰인 비문인데,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에, 복음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문에서 Maximus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가리켜, 신이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아구스도 황제의 생일을, 이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본문처럼 적었다. 그 이유는 아구스도가 이 땅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주었고, 세상질서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를, 신으로 숭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로마인들에게는 복음은, 아구스도 황제가,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 아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새 시대를 열고서, 구원과 평화와 질서를 주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복음은,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뜻했기에, 마가도 똑같은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마가는 로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힘차게 선포했다. 그 당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당시에는 로마황제를, 숭배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다. 그래서 로마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곳곳에 신전이 세워졌다. 또한 사람들마다, 이렇게 고백해야만 했다. “신의 아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러한 때에 마가는,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바로 이 신앙 때문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고, 바울도 순교했다. 마가도 순교할 각오를 하고, 그가 기록한 복음서 첫 머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시간 우리에게도, 이처럼 분명하고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 있기를 바란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시대를 활짝 열어줄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릴 것이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복음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는 책이, 이사야서이다.
그래서 이사야를 ‘복음의 선지자’라고 부르며, 이사야서를 ‘제5복음서’라 부른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통해, 복음의 의미를 살펴보자.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전, BC 739년 전에 태어났다. 역사의 마지막에 서서, 역사의 마지막 미래에서, 과거를 보고, 예언한다.
그래서 이사야 자신보다, 훨씬 뒤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과거처럼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회복도 말한다. 더 후대에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 받는 내용도 예언하는데, 과거형으로 기록한다. (53장)에 잘 나타난다.
(사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여기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므밧세레트)라고 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다. 그러면 ‘아름다운 소식’,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 끝 부분에서, 밝혀지고 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음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그 다음에서 나타난다.
(사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이사야 선지자는, 아름다운 소식(복음은), 여호와가 강한 자로, 포로된 자를 건져내고, 친히 그의 팔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릴 것이다.
왜 하나님이 임해서 다스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이 되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임하면,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나, 고국으로 되돌아가고, 예루살렘 성전도 다시 세워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강림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다.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여기서 ‘좋은 소식’과 ‘복된 소식’은 원전이 같다. ‘므밧쉐르’ 복음이다. 하나님이 통치하면, 평화와 복과 구원이,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와서 다스림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임하면, 새 시대가 열린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이 임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와서, 다스림이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기쁜 소식)이라는 말이 ‘베소라’인데, ‘바사르’(육체)에서 파생되었다. (요1:14上)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심이. 바로 히브리말로, 복음(베소라)이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왜 복음의 시작인가?(1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라고 했다. 마가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임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이고,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예수는 성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다. 예수는 인명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직명을 가리킨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태조는 왕명이다. 이성계는 인명이다. 이처럼 예수는 인명,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왕명, 직명에 해당한다.
(1) 예수(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에, 천사는 요셉에게(마1:21), 마리아에게도 각기 나타났다(눅1:31).
그리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게 일러주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인명은, 예수님이 나기 전에, 이미 지어진 이름으로, 천사가 전해주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기, 예수님의 사명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라는 인명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 호세아와 똑같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호세아는,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식으로 표기한 것이, 예수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신약 성경에도, 예수라는 인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를 해결하는가? 종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우리 죄를 해결해야 함을 말한다(십자가 신학).
(2) 그리스도(요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리스도’는 헬라어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나, 메시아는 똑같다. 이 말은 ‘기름을 붓다.’(마샤흐)라는, 동사에서 왔다. 메시아는 수동형으로, ‘기름 부어진 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의 종합적인 의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이다. 왜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는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는 뜻이다(눅4:18-19, 21).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선지자, 또 왕에게 기름이 부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이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또한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강림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제사장(히3:1)과 선지자(히1:1-2)와,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가진 메시아(마2:2)로 왔다고 밝힌다. 예수님은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며, 왕인 메시아 곧 그리스도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특별히 왕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이 왕으로 와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본문 말씀대로, 왕이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사용된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왕명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왕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임해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린다.
따라서 왕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시대를 열어주고,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와 복을, 풍성하게 내린다. 그러므로 왕인 예수님께 기쁨으로 나아가, 감사함으로 그를 경배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다스림을 받기 바란다.
3. 하나님의 아들(1上).
“하나님의 아들…” 마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다. 오늘 본문의 논리적인 순서는 이렇다. ‘복음의 시작이라.’ 이 땅에 새 시대가 열렸다.
누구에 의해 열렸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렸다. 예수님이 왕으로 강림해서, 이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땅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느 계통의 왕인가? 이 세상의 왕들처럼, 선대로부터 왕권을, 세습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하늘에서 강림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세상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들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의 나라는, 결코 쇠하거나, 망하지 않고, 영원하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유앙겔리온)은, 항상 단수로 사용했다. 예수님만이 참복음의 시작이고, 새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았다는 뜻인가?
그래서 그 때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인가? 아니다. 이런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예수님은 영원한 분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아들의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의 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아들이라고 할 때, ‘낳다, 출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경은 때때로, 아들이라는 단어를 ‘동등하다, 같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보면,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이라고 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레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성질이, 바로 우레와 같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말의 개념이 출생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때가 있다. 때에 따라서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동등하다, 같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도, 바로 이와 같다.
(요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기에,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했다(빌2:6).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신성(하나님)을 강조하는 말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9번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들 중에, 가장 흥미로운 증언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을 때(1:11)와, 변화산에서 변화되었을 때(9:7), 십자가에 매달릴 때(15:39)에, 증언이다.
이 3가지는 구원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침례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선포되는’ 사건이고, 변화 산의 변화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실체를 보여준 사건’이며, 십자가는 ‘인류의 구속을, 마침내 완성한 사건’이었다. 마가복음은 구원사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땅에 왕으로 강림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분이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기쁨과 즐거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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