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2월 24일 -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마1:21-2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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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마1:21-23)
‘기쁨이 넘치는 성탄절 되세요!’ 서로 인사하기 바란다. 성탄절은 전능하고, 거룩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온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예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절기가 성탄절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행사에서, 예수님이 사라진, 성탄절을 많이 보게 된다.
산타크로스와 선물과 추리가 판을 친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임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땅에 온 목적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왜 ‘성탄일’이라 하지 않고, 성탄절이라 하는가? 석가는 ‘탄신日’인데, 예수님의 성탄은, 왜 성탄節인가? 절(節)은 마디, 기간의 단락을 말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태어난 날보다, 죽은 날이 더 기념되었기에, 예수님의 태어난 날을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이 땅에 태어났지만, 정확한 날자는 모른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라고 한 때는, 4C부터였다. 역사상 교회들은 12월, 1월, 2월, 3월, 4월, 5월에도, 성탄절을 지킨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탄생하신 날은, 아무도 모르고, 학자들마다 다르다, 누구의 주장이 정확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하는 날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모두 다 모르기에, 이단들은 그 날은 이방인의 축제의 날이라고, 공격한다.
5월 8일이 어버이의 날이지만, 5월 8일만 어버이를 섬기면 안 되고, 항상 섬겨야 한다. 따라서 12월 25일만, 성탄절을 기념하지 말고, 항상 예수님을 기억하고 섬겨야만 한다. 그 날짜를 모르기에, 이를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다. 우리는 이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지내야 한다.
1. 구원자에게 붙여진, 이름은 여러 가지다.
(1) 예수(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예수스)라 했다. 라틴어(예수), 영어(지저스) 히브리어는 (예슈아, 그가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지어 준 이름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다.
무엇에서 구원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는 분이다. 그러기에 예수라는 이름만으로도, 구원자, 구주가 됨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떠한 모범을 위해, 살아갈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구원을 성취해야 할 사명을 보여준다.
(2) 그리스도(마1:1下).
“…그리스도”는 헬라어다. ‘크리오’(기름붓다)에서 파생된 말로,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단어다. ‘왕, 제사장, 선지자.’ 세 직분은 기름을 부어서 세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는 제사장으로 온 분이다. 이러한 3가지 직분을, 모두 가진 분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직함을 가졌다. ‘그리스도’라는 한문 명칭이 基督이다.
(3) 이사야가 예언한 아들의 이름들(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기묘자’는 Wonderful이다. ‘멋진 분, 훌륭한 분, 놀라운 분’이란 뜻이다. 모사(謀士)는 영어 성경에 Counsellor로 쓰였다. ‘상담자, 조언자’라는 뜻이다. ‘전능한 하나님’은,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영원히 존재하시는, 창조주로 아버지가 되신다.
‘평강의 왕’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준, 평화의 왕이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의 이름들이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준 이름이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약700년 이상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다.
우리나라가 2,700년 전이면, 고조선 시대에 활동하던 때에, 활동하던 선지자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 이상 전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장차 오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예언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이다.
(4) 임마누엘이다(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속에 현몽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한다. 그런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다.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름이다. 왜 예수님이 임마누엘인가?
예수님은 구원자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모든 곳이 다 계신다. 안 계신 곳이 없다. 과거에도 계시고, 오늘도 계시고, 온 세계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다.
천지창조 때부터 있는 분이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또 ‘무소부재’(無所不在) 안 계신 곳이 없는 분이다. 그 임마누엘의 성자 하나님, 사람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은, 우리 주님이다.
2. 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임마누엘 했는가?
(1)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셨다(21中).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남의 백성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아니다. 자기 백성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 임마누엘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상상하기에도 힘든 사건이다. 황제가 거지와 노예를 구하기 위해, 거지와 노예가 된, 의미 이상의 사건이다.
거지와 노예를 구하기 위해, 황제가 왕자를 버릴 수 있나?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만든 사건이다.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그 거지와 노예를, 자기의 아들 삼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면서,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의 몸으로 온 것이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2)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죄가 문제다. 죄를 해결해야만,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데, 이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일4:10-1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죄인을 구하러 온,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 그래서 스스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었다. 십자가에 흘린 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를 해결했다. 우리 구원이 완성되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인간은 타락했다. 그래서 죄로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였다. 죽은 존재인 줄도 모르고 살았고, 죽음으로 가면서도, 죽음의 길인 줄 몰랐다. 그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오셨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은 다른 목적은,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약속의 성취자’로 오셨다(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예수님이 메시아로 온다는 예언은, 성경에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 예언이, 그대로 모두 다 성취되었다.
‘처녀의 몸에 잉태될 것’이라, 예언한 것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도 성취되었다. ‘임마누엘의 이름을 갖게 될 것’도 성취되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해, 찔리고, 피를 흘릴 것’도,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 이루었다.’이다.
구원을 다 이루었다는 것도 되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예언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약속과 성취의 책이다. 예수님은 약속의 메시아요, 성취의 메시아다. 주님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다 이루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은, 다 이루어진다.
3. 임마누엘의 예수님(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다. (사7:10-) 이스라엘 왕 베가와, 수리아 왕 르신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유다 왕 아하스에게 말씀한다.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거절하고, 그 대신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13中)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네가 내 말을 거절해? 두고 보자.’해야 맞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14)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네가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친히 징조를 주겠다고 하고, 준 징조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이 주어진 원래 상황은, 자격 없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함께 해 주겠다는, 은혜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아하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임마누엘을 약속했다. 따라서 임마누엘은, 자격 없는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언이다. 그런데 (마1:23)에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하나님이 선포한다.
주님은 초림 때부터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구원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은혜는, 값없이 주는 은혜로의 임마누엘이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니,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 과거에도 함께 했다. 현재에도 함께 한다. 미래에도 함께할 우리 주님이다. 우리가 힘들 때에, 멀리 떠나는 분이 아니다. 그때도 항상 함께 한다. 오늘 이 예배 자리에도 함께 한다. ‘임마누엘’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뻐해야만 한다. 성탄은 인류역사에, 최고 사건이다. 왕의 왕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따라서 특별히, 구원받은 우리는, 기뻐할 사건이다. 그런데 성탄절에 기뻐하기보다는, 슬퍼하는 사건들이 많다고, 슬퍼하면 안 된다.
성경을 보면, 동방 박사들도 달려왔다. 목자들도 기뻐하고 달려왔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기뻐해야만 한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 제일 기뻐해야 할 사람은, 유대 땅에서 보면, 땅 끝인 이 한반도 변방에, 살던 우리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분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임마누엘’ 예수님의 성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한 번 생각해야 할 때다. 임마누엘의 은혜와 복이 넘쳐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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