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2월 17일 -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요일4:7-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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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요일4:7–12)
1-2장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루었다. 3:1-4:6은, 하나님의 자녀의 관점에서, 합당한 신앙생활 문제를 다루었다. 4:7-5:3은, 하나님의 참 사랑에 근거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문제를, 특별히 다루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 불린다.
요한 서신에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요일2:3-11, 3:13-24, 요이1:5). 그 가운데서도 (요일4:7-5:3)은, 가장 집중적으로, 형제사랑의 실천을 역설하는 부분이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초청을 한다. 여기 4장에서만, 사랑을 31번 말한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 ②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③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또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면서 사랑한 만큼, 우리의 생명을 바쳐 사랑하기를 원한다.
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음을, 깨닫게 될 때 ② 인간이 하나님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③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실천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사랑을 깨달았기에, 이삭을 바치는 사랑을 할 수 있었다.
그 사랑이 완성되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처갓집의 말뚝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이 미워 보이고, 이웃이 밉게 보이고, 목사도 미워 보인다.
1. 서로 사랑하자는 권면(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이, 아가페토스 : 매우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며, 자신은 독자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자에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며, 권했다.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사랑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요일2:10, 3:11).
예수님은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계명을 전하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아가포멘)고 했다. 요한은 명령하지 않고, 모든 성도에게 함께 사랑하자고 권했다.
현재형으로 사랑이, 계속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서로’(알렐루스)는 성도가 해야 할 사랑이다.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서로 주고받는 쌍방의 사랑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은 서로 주고받을 때, 더욱 커지며,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에서 ‘속한’(에크, 원천을 나타냄, ~에 의하여, ~에게로부터 나왔다)는 말이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타락한 인간에게, 속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성도는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자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나? 형제를 사랑함으로, 비로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다. 이는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 형제를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때, 철이 든다. 잔소리로만 느꼈던 부모님의 말씀들이,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을, 늦게나마 후회하게 된다. 또한 어린 아이들의 경우, 물이 끓고 있는 냄비를 만지고, 뜨거움의 고통을 경험해야, 아무 것이나 만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심정을 알듯이,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해도,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기를 바란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곧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면, 마땅히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고 있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씀한다.
2. 사랑의 모델(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투토) 나타났다 했다. 이렇게는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의 ‘이처럼’이 ‘이렇게’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사건을 말한다.
‘나타난바 되었으니’는, 감추어졌던 것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어떻게 나타났나? ‘자기의 독생자를…,보내심은’ ‘보내심은’(아페스탈켄, 아포스텔로 : 사명을 주어서 보내다)의 현재 완료로, 독생자 메시아가 육체로 오심은, 이미 완료되었고, 성육신한 결과가, 현재도 계속남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른 구원자는, 다시 있을 수 없고, 그 결과는 영원하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냄은,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했다. ‘살리려’(제소멘, 자오 : 살아있는)는, ‘살다, 생활하다’라는 뜻과 함께, 의미 있는 삶, 특히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삶을 나타내는 ‘살아나다’라는 뜻이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엡2:1).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의로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만이, 영적 사망상태에 놓여있는, 인간들에게 새 생명을 넣어 줄 수 있다(요12:24). 한 생명의 죽음을 통해서, 영적 사망자가 중생한다는 사실은, 역설적 진리이다.
독생자의 파송 때부터,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은,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기로 작정했다. 타락한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기로, 작정했다.
타락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아담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 동산 서늘한 곳에서 하던 교제가 두려워 숨었다. 타락한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사건이 십자가라고 하면서, 보충설명을 한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속한다는 말이다.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 죄에 팔린 우리를, 값으로 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었다.
‘화목제’(힐라스모스, 셀렘)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다. 화목제에는,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염소’ ‘짐승’의 피가 사용되었다. 구약의 모든 제물은, 피를 흘려 죽음으로, 죄를 대속했다.
짐승의 제사는 불완전하기에, 죄를 완전하게, 해결해 주지 못했다. 따라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가 드려지기 전까지, 계속 반복되어야만 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제물처럼 죽기위해 왔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죄를 사하고,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화목제물로 보냈다.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구원의 선물을 주려고, 하나님이 택한 방법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지 못하기에, 인간의 몸으로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성도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방법(11-12).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같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보낸, 하나님의 구속을 말한다. 우리를 사랑하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않고, 희생시키기까지 사랑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의 본성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모습이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죄인이었고, 불의하고, 경건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내놓았다. 이것이 계속 강조되는, 성도들의 사랑의 모델인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한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 후에, 그 사랑을 입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논리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마땅하도다.’(오페일로멘, 오페일로)은 ‘빚지다, 의무를 지다. 매여 있다’로,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말한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사랑했기에, 우리도 당연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법적 용어로 강조하지만,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선택사항은 아니라 의무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자이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행위라고 했다(12).
당시에 신학과 윤리를 분리시키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들을 향해, 우회적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드러나야 하는, 사랑이 없다면, 당시 이단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경계되는 교훈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요일4:12)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없으되’(우데이스)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하는 부정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체를 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모세조차도 하나님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출33:18-23).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는 분으로서(딤전6:16), 만약 그를 보게 되는 사람은 죽게 된다(출33:20).
그런데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은, 자신들이 환상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의 모순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상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보이고,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 무엇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 사랑하는 가정, 사랑하는 어울림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한다는데, 그 하나님이 보이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강권되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의도한 목표를 이룬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런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타락한 본성대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온, 우리 인생은,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기에, 세상의 방법으로, 사랑을 알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몇 가지만 말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말로 사랑하자.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앞에서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 했다(3:18). 말과 혀로도, 사랑해야 한다.
말로 하는 사랑이, 가장 쉬운데 그것도 잘 못한다면, 그 다음 사랑은, 하기가 더욱 어렵다. 긍정의 말을 하고, 칭찬과 격려를 하고, 사랑의 말을 하라. 말로 하는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표현하라.
② 돈으로 사랑하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하라 할 때, 요한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쳐 준 것은, 이 세상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했다. 돈으로 하는 사랑은, 돈으로 사랑을 사라는 것이 아니다. 재물을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③ 몸으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14). 발은 가장 냄새나고 더러워, 하인들도 꺼리는, 굿은 일이었다. 서로의 연약한 부분, 더러운 부분, 힘들어 하는 것들을, 함께 감싸고, 닦아 주어야 한다.
④ 용서함으로 사랑하라. (벧전4:8中)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용서를 모르면, 아직 복음을 모른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용서할 사람이 누구인가? 용서하지 못하며,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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