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1월 26일 - 형제를 사랑의 실천(요일3:19-2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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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랑의 실천(요일3:19-24)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마땅하다면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다.
오늘 말씀은,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결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참된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과, 신앙의 더욱 큰 확신이 생기게 된다. 자신과 하나님께 책망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주님 안에 거하는 자의 삶임을 말씀한다.
1.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담대하게 살라(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로써’(엔 투토)는 앞 절의 ‘행함과 진실함’을 말한다. 행함과 진실함 안에서 ‘우리가 안다’(기노스코멘), 계속해서 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진리에 속한 줄을, 우리는 계속 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실한 행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각자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하고 실천할 때, 하나님 앞에서 굳세게(페이소멘) 할 수 있다. ‘페이’(화해하다, 의존하다)의 미래형이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을 때, 주님 앞에서 화해되고, 주님을 의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암8:11中)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말씀을 듣지 못함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함이 문제고, 그대로 살지 못함이 문제다. 우리 주번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지금 이 시대에는 목사도 많고, 서적도 쏟아져 나오고, 방송설교도 넘쳐흐르고 있다. 그런데 행함과 진실함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진리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은 알되, 올바른 행함이 없다면, 진리를 왜곡하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진리를 왜곡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진리에 속한 자들의 진실한 행함을,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원하고 있다.
매일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진리의 말씀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한다. 진실한 행위가 있는 성도들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계신다.
(20-21)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담해함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책망할 만한 일들을, 발견한다. 하물며 모든 것을 아는 하나님은, 우리의 책망 받아야 할 일을 더욱 찾아낼 수 있다. ‘책망하다’(카타기노스케)는, ‘카타’(~에 대하여, 반대하여) + ‘기노스코’(알다) = ‘~대해 적대적으로 알다.’이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고, 지적함을 말한다.
여기서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의 확신을, 성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래 참는 분이다. (벧후3:9中)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기까지, 심판을 늦추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 참는 하나님의 속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죄를 지어도, 심판하지 않는 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우리 죄까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너무 작은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한 분으로 증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 책망할 부분이 많다. 그런데 바로 책망하지 않음은, 오래 참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작은 하나님’으로 축소시키지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기도를 자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도대로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왕상8:27中)인 고백듣기에 족한 분인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있다.
하나님은 약하고 유한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무수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크기는 얼마만한가?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분인가? 주눅이 들어,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이, 너무 왜소하지는 않는가? 그렇게 되면, 어떤 작은 문제에도, 쉽게 낙담한다.
또한 무슨 일이 이루어지면, 모두 자기 힘인 줄로 착각한다. 자기의 울음소리에, 태양이 떠올랐다고 믿는, 수탉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만, 우리에게 역사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무한한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머리로 제한하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동이다(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며, 구하라고 했다.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마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다.
성경은 곳곳에서, 구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임을 증언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구하는 것마다, 다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인가? 아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다 받기 위해서는, 구하는 자와 하나님의 교제와, 구하는 이유 또한 중요하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의 이기적 욕구와, 정욕을 채우기 위해, 구하기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구하여야 하겠는가?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계명’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동일하게 본다.
형제를 사랑함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우리의 구함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과 깊이 사귐을 갖는 모습이고, 이를 주님이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기뻐하는 일, 우리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일을 구할 때, 우리는 구하는 것마다, 다 받지 못한다. 하지만 주의 계명을 지키는 일,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구할 때, 우리의 구하는 것은, 모두 응답이 될 것이다. 결코 우리의 정욕이나, 우리의 기뻐하는 일들을, 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구하라고 했다. 그런 구함은 어떤 것이든, 다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간구를 하기 바란다. (잠28:9)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 하신 하나님 등으로 소개한다. 영지주의와 적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자들과 구별된, 믿음으로 소개하며, 그의 대한 믿음은, 예수님이 주신 계명들을 행하도록 만든다. 요한은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새 계명에 대해 말했다. 그 계명이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의 본질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적인 항목들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계명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율법을 읽고 외웠다.
율법의 항목을 지키는 것이 구원이요, 율법의 항목들을 어기는 것이 죄악이었기에, 율법의 항목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항목들을, 철저히 지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할 뿐이었다.
결국 이 계명은, 다른 새 계명으로 대체되었다. 그 계명이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고, 새로운 계명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을 의지하여, 계명의 항목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계명이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새롭게 선포된, 새 계명이다.
예수님은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했다. 즉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부디 이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시기를 바란다. 그분의 계명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주님이 안에 거한다는 증거(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랑의 계명을 행하는 성도와, 예수님과의 연합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 안에 거하고, 또 그는 주안에 거한다.’는 사상은, (요15:7)에도 나타난다. 지키고 있는 자는,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자를 말한다. 그는 주님 안에 거한다. 현재형이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출발점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 즉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악한 영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성령님이 거하면, 성도들의 믿음의 확신을 갖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성령님의 거하심은,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의 표시였다. 요한은 여기서 내주하는 성령의 사역으로, 본장을 마무리함으로, 성결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는 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있다.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면, 아무리 세상의 것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유혹해 와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 마음과 생활에, 성령님이 이미 거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지기 전에, 우리를 유혹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 유혹이 너무 달콤하여,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마비시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우리 심령의 빈자리를, 성령으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성도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고,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
사도 바울은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임을 깨닫고,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막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으라.’(에케테 피스틴 데우)는, 원문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믿음이 무엇일까? (막11:23-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믿음은 ①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며 ② 구하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 ③ 용서하는 믿음이다.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그대로 된다. 사랑하고 용서할 때,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님이 역사하기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살라. ②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함이 된다. ③ 주님 안에 그 안에 거하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생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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