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1월 19일 -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요일3:16-1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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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요일3:16-18)
지난주의 말씀은,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미워한다. 그 사실과 더불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며, 그에게는 영생이 없다고 했다. 오늘 말씀은, 형제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사랑해야 할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향한, 희생의 사랑을 제시한다.
사랑을 말하기는 쉽지만,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확실한 열매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생활에 나타내야, 비로소 사랑으로서의 가치를,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사랑에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에(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아우투) 목숨(ㅍ쉬케)을 버렸다(에켄, ←티미, 맡기다.) ‘위하여’(휘페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이타적인 희생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망에 거하는 영혼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건져내는 십자가며, 그 영혼들에게 부여하는, 새 생명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의 사랑까지도 살아야 한다. ‘이로써’(엔 투토)는 ‘그 안에, 그에 의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실에 의해’ 사랑을 알았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은, 사랑에 대해 무지한 인간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사랑(아가페)은 여러 종류의 사랑들 가운데,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 아가페’ 중에서, 최고 덕목이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조금도 없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내어주는 사랑, 의로운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불의한 자들을 살리는 사랑이 ‘아가페’다. 그 아가페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의 뜻을 위해서 살아왔던 자들을 위해, 의로운 그리스도가 기꺼이, 그 고귀한 생명을 내준 것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알고’(에그노카멘)는, 단순한 지적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인 ‘기노스코’의 완료형이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대하여,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알았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이 필요한 형제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마땅하니라.’(오페일로멘, ← 오페일로, 채무가 있다)는, 현재형으로 이 일에 계속해야 함을 말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할 근거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그들은, 삶속에서도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고 한다.
스승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보다는 자기를 더 중시한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옛말이 된 것 같다. 어린 학생들도, 같은 반 아이를 ‘왕따’시키거나, 상급생이 하급생을 ‘찍어’서 괴롭힌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런 모습이라, 더욱 놀랍다.
타인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는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세상이 되었다.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과 대비할 때,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이다. 도무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어, 못과 창에 찔렸다. 또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독기어린 거친 말에 찔렸다. 더군다 우리 대신, 저주의 가시관을 머리에 썼다. 주님이 쓰신 가시관은, 광야에서 자란, 날카로운 송곳을 가진 가시다. 이 가시관을 썼을 때,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피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느라, 주님이 흘린 피다. 우리가 찔러서, 쏟아내게 한 피다. 내 이기심, 내 시기심, 내 자만심이, 가시가 되어 찌르고 찔러서. 흘러내린 핏방울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몽땅 주었다. 부끄러움도 참았다(히12:2中).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의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했나?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했다. 사랑을 받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라는 뜻이다.
십자가에서 실천한, 그 사랑을 이어받아, 사랑의 경주를 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아멘’하고, 우리 이웃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주님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어 하늘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곳을 향해, 우리를 희생하더라도 힘차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힘든 여정이 될 수 있다. 때론 포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사랑과, 베푸신 분의 간곡한 뜻을 헤아린다면, 결코 주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정신을 이어 받아, 힘차게 사랑의 질주를 하기를 바란다.
2.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중에는, 3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1)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 만한, 재물을 소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명기에 하나님이 준, 명령이 나온다. 잘 명심해 두어야 한다.
(신15:7-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 사실을 명심하여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용하면, 더욱 큰 재물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다. 특별히 재물을, 이 세상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만 재물이 필요하다.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재물이다. 그 재물은 어떻게 쓰느냐가,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이 원하는 형제 사랑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일에 쓰라고, 재물을 주셨다고 말한다. 재물을 가지고, 형제를 도와줌이, 진정한 행함이요,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준 복이 사명이다.
(2)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라고 했다. 보지 않았다면, 죄가 없었지만, 인색한 마음 때문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죄가 된다고 했다. (약2:1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했다. 우리는 주변에 가난으로 인해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지를 돌아보고, 또 그들에게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부담감이 사명이다.
‘궁핍’(크레이아)은, 일용할 양식같이, 꼭 있어야하는 기본적인 ‘필요’를 뜻한다. 이러한 필요들이, 다 채워지지 못하여 생기는, 핍절한 상태를 말한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을 뜻하는, 형제를 사용함으로, 교회 내에서 일용한 양식조차 없는,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는 말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사도들은 그 재물을 가지고, 공동체 내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행4:32-37).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교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이라고 했다. ‘도와줄 마음’(스플랑크나, 내장, 심장)을 뜻한다. ‘동정, 애정, 자비’로 번역한다.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다. 그러나 형제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돕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존재하지 않음을 증언한다.
마음에는 하나님의 감동이 온다. 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육신 안에서 꿈틀대는 정욕이, 도와주려는 마음을 닫았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비참한 환경에 처한 자들을 보고, 그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애끓는 심정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기도 하다. ‘닫으면’(클레이세)은 ‘클레이오’의 가정법 과거로, 단회적인 동작을 말한다. 궁핍한 형제를 보고, 도와주고 싶은, 감동으로부터, 자신의 긍휼을 닫아버리면 이라는 의미다.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돕고 싶은 마음을 닫아버리는 행위를 말한다. 즉 궁핍한 형제의 모습을 보고, 돕고자 하는 마음의 문이 열릴 때, 의도적으로 그 마음의 문을, 의지로 닫아버리는 모습이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하는, 이기적이며 죄악 되고, 모습이다.
오히려 교회 내에, 쾌락주의를 조장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들어옴으로 인하여, 재물을 형제들을 도와주는데 쓰기보다는, 죄 짓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현상도,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요한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애끓는 심정으로, 형제 사랑의 실천이 나타나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3.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말에 있다.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 고백도 하고, 서로 간의 사랑의 고백도 한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은, 말과 혀로써 사랑을 먼저 나타내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말로 표현되면, 가슴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주는, 설제적인 행동을 통해 증명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러한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보다, 말과 혀로만 사랑을 말한다. ‘말’(로고스)는 ‘말씀’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주고받는 ‘대화’를 말한다. 그리고 ‘혀’(글로싸)는, ‘언어, 방언’의 뜻으로 의사소통하는 언어다. 따라서 사랑은 구호가 아니다.
‘말과 혀’는 형제의 헐벗고, 굶주림을 보고, 혀로만 ‘배부르게 하라.’면서,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음을 말한다(약2:15-16). 그러므로 말은 있으나, 행함과 진실이 없는, 공허하고 거짓된 것이다. 참된 사랑에는, 말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유익한 실제적인 행위가,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행함’(에르곤)은, 어떤 사람이 감당해야 할, 자신에게 맡겨진 ‘일, 행동’을 뜻하며, 성도들이 행하는 삶의 윤리적인 면, 믿음의 외적표현인, 성도의 ‘행실’과 ‘행위’를 말한다. ‘진실함’(알레이아)는 ‘진리, 진실’이라는 뜻으로, 진리에 부합하는,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행함과 진실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부합하는, 윤리적인 행위와, 진리의 말씀에 부합되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들을 말한다. ‘말과 혀’와 ‘행함과 진실함’은, 그 의미와 반대표현으로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다. 즉 사랑은 추상적인 명사가 아니라, 직접 행동하는 동사이다.
사랑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말하는 입이 아니라, 형제의 필요를 살피는 눈이요, 나누는 마음과 손과 발이며, 어려움과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이다. 사랑은 연민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기의 소중함을 베풀 줄 아는 행동이다. 이처럼 베풀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도와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어,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몸을 드려 봉사하자,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 머리에만 머무르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가, 손과 발을 움직여 삶이 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말로는 하기가 쉽지만, 열매를 맺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확실한 열매의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면, 힘들어지고, 할 수도 없다. 먼저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고, 살인하는 자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죄인을 위하여 버렸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랑의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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