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1월 12일 - 영생을 얻은 증거(요일3:13-1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1-12 |
첨부파일: 영생을 얻은 증거 사랑실천.hwp(23K) |
영생을 얻은 증거(요일3:13-15)
지난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를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다. 하나님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씨를 주셨다. 그 씨는 말씀이며, 성령이라고 했다. 또 의를 행하지 않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고 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을 들었다. 계속 죄를 품은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되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영생을 얻었기에,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영생을 얻은 증거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또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구원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요한이 처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주제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다가 이제는,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논리에 이르고 있다.
1. 세상이 미워한다(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상히 여기지 말라’(메 우마제테,)가 원문에는 앞에 나온다. 현재 분사로, 이미 발생한 동작의 계속을 금지한다.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한다. 당시 성도들이, 크게 미움을 받았다. ‘미워하다.’(미세오)는 ‘몹시 싫어하다’는 뜻으로, 감정적인 요소만 아니라, 실제로 적대적인 행위를 보이는, 행동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미워할 뿐 아니라, 대적하여 서로 반대편에 서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했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다.
세상은 같은 동류이기에, 세상을 사랑하지만, 성도는 미워한다. 같은 동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빛 된 자신에게 속한 존재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했다. 이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죄를 지었다.
같이 술 마시러 다녔고, 2차, 3차, 가지 말아야 할 곳까지 다녔어도, 재미있고 즐거웠다.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면서, 죄 가운데 파묻혀 살았지만, 인생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서로 의기가 투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주님을 알고 나서, 주님의 자녀로 거듭난 삶을 결단했을 때, 세상에 속하였던 내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소속을 바꾼 이후에, 세상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미움을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까닭이 없다.
호형호제 하면서, 오히려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데, 예수님은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다. 주님은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미움을 받지 않도록, 다시 세상을 사랑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야 하겠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거룩한 백성의 삶을 버리고, 사단의 종노릇을 해야 하는가? 아니 그럴 수 없다. 내가 미움을 받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기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당시 1세기 후반에는, 미움이 박해로 나타나,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고, 순교했다. 이러한 일이, 당연히 일어날 수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고, 매우 상식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마귀에게 속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는 것은,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초대 교회를 향한, 로마의 핍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을 화형 시켰고, 사자 밥이 되도록, 사자 우리에 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핍박은,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사단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독교는 이러한 핍박을 통해서,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핍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던 불신자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바울은 (고전4:11-13)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며 핍박을 기록했다.
그러나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사도 바울처럼, 세상으로부터 박해받기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는가?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박해받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박해를 받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영광을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성도 가운데도, 많은 수가 박해를 받는 대신, 영광을 얻고, 부요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박해받는 것은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핍박은, 우리를 상하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그 핍박을 통해, 기득교가 더욱 융성하게 발전하는 것을, 초대 교회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에서 박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엡3:13中)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고난에 실망하지 말자.
2. 형제를 사랑한다(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은 ‘형제 사랑’이,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이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는 알고 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들어갔음을, 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 사랑’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다.
‘옮겨 들어갔다.’(메타베베카멘, 메타바이노의 완료태)는, ‘메타’(함께, 다시) + ‘바이노’(걷다, 가다) = 함께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말이다.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함께 다시 갔다는 단어다. 사망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이미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요한은 사망에서, ‘에크’(~에서) 생명으로 ‘에이스’(~에로)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 형제에 대한 사랑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은, 요한복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5:24)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는 조건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낸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모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표현이 있는데, 인칭만 제외하고 동일하다. 따라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롬10:9-10). 따라서 본문을 오해하여, 사도 요한이 행위구원을 주장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나타내주는 증거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감은, 거듭남을 의미한다. 거듭남은 우리 심령에, 이루어지는 변화다. 따라서 눈으로, 명백히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거듭남의 표식을 눈으로 보이는, 행위 가운데서 찾는다. 그중 가장 중요한 표식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형제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자들만 사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마음에 맞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깨닫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세상이 갖고 있는 속성이, 미움과 증오, 죽임(가인의 속성)이라고 하면, 진리에 속한 성도의 속성은 생명, 사랑이다. 혹시 성도의 마음속에, ‘저 사람을 확 죽여 버릴까?’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세상의 속성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면, 가인과 같은 살인자가 되고 만다.
3.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다(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랑하지 않음’(10)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했다.
‘사랑하지 않음’은 ‘미워함’이요, 결국은 ‘살인행위’로 나타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다. 요한은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에서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가지다’(에케이)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는,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말한다.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이 의인 아벨을 증오하여 죽였듯이(12),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한 형제 – 미움 – 분리 – 살인으로 이어진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나? 그 이유를 자기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롭기에 죽였다고, 사도 요한은 설명한다. 사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하나님이, 자기의 예배를 받지 않은 이유를, 아벨에게서 찾은 것이다. 왜 그런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이유로, 세상이 빛의 자녀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다르기에, 하나님께 속한 우리를, 세상은 미워하고 대적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는 말이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가슴이 찔렸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렇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로 쳐 죽이는, 선택을 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삶이, 그의 소속을 증명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이상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다. 함께 공동체를 이룬 형제, 자매들이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모함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르는, 증거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설명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믿음의 열매가 드러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가인처럼 잘못된 증오를 담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 중에 “나는 다른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라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는 마음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예수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5:28中)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했다. 세상 법으로 보면, 살인이 아니지만, 주님의 법으로는, 이미 살인을 한 것이다.
살인의 경우, 다른 사람을 죽이는, 타살만 살인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자살도, 심각한 살인이다. 성경은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드러내는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7년 11월 5일 - 하나님의 자녀를 분별하는 방법(요일3:9-12) | |
다음글 : 2017년 11월 19일 -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요일3:16-18)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