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1월 5일 - 하나님의 자녀를 분별하는 방법(요일3:9-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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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를 분별하는 방법(요일3:9-12)
지난 번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대조하여 말씀했다. ① 죄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마귀의 자녀는, 죄를 지으며, 불법을 행하지만,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 ② 주님 안에 거하는지, 거하지 않는 지로, 알 수 있다.
③ 의를 행하는지, 죄를 행하는 지로, 알 수 있다. 죄를 짓는 자(현재형)는,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로, 마귀에게 속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가 악을 멸하기 위해, 이 땅에 왔기에, 예수님을 영접한, 거듭난 성도는, 죄에서 벗어나서 살려고 한다.
무한정 죄 안에 머물러서, 계속해서 죄만 짓는 삶을 살수 없다.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떠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죄를 이길 수 있는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선물로 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씨다(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는 (6上)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의 반복이다. (요일1:8, 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본 절은,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경고다.
사도요한 당시에 영지주의는, 2부류가 있었다. ① 영지를 깨달은 자는,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② 영지를 깨달은 자에게는, 죄가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으므로 범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어떻게 행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요한은 ①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범죄 함을 역설하였고(1:8,10), ②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신자들은 범죄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역설했다(2: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거듭난 자’를 말한다. ‘난’(게겐네메노스, ← 겐나오)은, 출생을 의미하는 동사이며, 분사 완료다.
‘부터’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다는 말이고, 인간의 육체적 출생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의 ‘의지, 소원, 능력,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3:3中)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5中)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필수 조건인데,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으로, 죄인의 거듭남이 이루어짐은,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새롭게 출생한 자는, 타락한 자아가 추구해 온 것에서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는 불법을 멀리하며, 성결한 삶을 추구하는 자임을 밝힘으로, 수신자들로,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했다. 그 까닭이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씨’(스페르마)는 ‘씨앗, 후손’을 말한다. 이는 ‘뿌리다’(스페이로)에서 왔다.
하나님의 씨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성도들에 있기에, 그들로 죄를 짓지 않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 씨가 무엇일까? ① 말씀 ② 성령이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말씀이 심어져 있다. 성령께서 내주한다. 이는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다.
①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고 (약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에 근거한다.
베드로는 성도의 거듭남은,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된다고 했고,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때만, 중생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요한은 생명력을 있는 ‘씨’를, 거듭난 새 생명의 이미지와 연결했다.
중생한 자는, 결국 죄에 대하여 승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죄에 대한 승리와도 연결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 안에 거할 때,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요일2:5, 1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중생한 자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다.
② (요3:5-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중생에 대해 말씀하면서,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밝혔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 타락한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갈5:16-23).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라는 생명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모님께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게 된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앗으로 인해, 자랑할 것이 없다. 즉 말씀과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거할 때, 그는 범죄 하지 않게 된다.
2.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는 앞의 말씀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구분하는 근거는 ① 의를 행하는지의 여부와 ② 형제를 사랑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인간의 행위에 달려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요한이, 행위만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고 있지 않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행위는, 마귀의 자녀와는 뚜렷이 드러난다. ‘드러나나니’(ㅍ하네라 에스틴)는 ‘ㅍ하네로스’(빛나는, 공개적으로 나타난)이라는 뜻이다. ‘에스틴’(에이미)의 현재 직설법 동사와 함께, 드러남을 사용하여, 미래가 아니라 바로, 현재에 밝히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마지막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완전히 구별되지만, 현재 시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판단기준을, 의를 행하는 삶과,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제시한다. 영은 육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잘못된 삶을 살았다.
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테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어느 대낮에 등불을 들고, 길거리에서 무엇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은, 디오게네스에게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묻자, ‘사람을 찾는다.’고 대답했다.
시민들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등불을 들고, 찾느냐고 했다. 그러자 “사람다운 사람을 찾지 못하여 등불을 들고 찾았지만, 끝내 의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이 지구에는, 70억이 넘는 인구가 산다. 그 중에 유명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찾으라면, 쉽지 않다.
사람들은 참된 생활을 외면하고, 인기와 명예를 찾는다. 남을 위한 희생보다, 다른 사람에게 찬사와 욕구충족을 원한다. 양심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의인의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에 힘쓰는 자들이, 의에 이르게 된다(롬6:16).
②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단순하지만, 큰 충격을 준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흔하게 저지르기 쉬운 범죄 중 하나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다지 큰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 동안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수정해야 한다.
불후의 명작 ‘보물섬’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하던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때 부인이 뒤따라 나가서, 남편을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티븐슨은, 오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드릴 수가 없소!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채,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일들이 많지만, 주일마다 버젓이 하나님 앞에 나와,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드리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행한 고백대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백만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형제들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형제의 죄를, 백만 번이라도 용서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3.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드러난다(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처음부터 들은 사랑의 복음을 전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준,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들은, 주변에 있는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가짜가 판 치는 시대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랑이 아니라, 시기와 미움이 가득한 모습이, 안타까운 나타난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를 보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거기는 세상의 어떤 불순한 것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큰 의와 사랑을 경험한, 의와 사랑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큰 의와 사랑을 경험한 성도는, 의와 사랑을 증거하며, 나타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경험한 성도로서,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하나님의 자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형제를 죽인 가인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속하여’(엔-)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처음부터 불법한 자요, 거짓의 아비인 사단을 말한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과 같은 영원한 멸망의 처해지도록 유혹한다.
사단의 영향 아래에 있는 자는, 사단의 종이요 노예다.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는, 12명의 사도들에 포함된 자였지만, 그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감으로, 사단의 도구가 되었다(눅22:3). 베드로도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유혹하는 미혹을 받았다(눅22:31).
이와 같이 사단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미혹한다. 사단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빠졌다. 가인도 사단에게 영혼이 팔려,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동생 아벨을 살인한, 살인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님은 형제에 대해, 노하는 자마다, 살인한 것과 동일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했는데(마5:22), 만일 형제에 대해, 사랑의 마옴이 아니라 악의를 품는다면, 그 역시 가인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셈이다. ‘죽였느냐’(에스팍센, ← 스파조, 도살하다, 살육하다)는 말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되, 마치 짐승을 도살하듯이, 무참하게 살해했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이유를, 아벨의 행위는 의롭지만, 가인의 행위는, 악했기 때문이라 했다. 미완료 과거다. 가인의 악함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악했다. 계속 악한 마음을 품었기에, 결국 악한 행동을 했다는 말이다.
반면 아벨의 의로움도, 미완료 과거다. 아벨의 인격이 계속, 의로움을 품었기에, 의로운 행동을 했다. (창4장)에는,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은 하나님에게, 원망을 품은 가인이, 시기와 증오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혹시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빨리 풀기 바란다.
계속 품으면, 결국 사람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계속 품을 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 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닮고,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를 닮는다. 나는 누구를 닮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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