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0월 15일 -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요일3: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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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요일3:1-3)
적그리스도는 거짓말을 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의 통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 땅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들었던, 복음에 거해야 한다. 적그리스도는 미혹하기에, 미혹되지 말라고 썼다.
성도는 주께 기름 부음을 받았으니, 아무도 또 다른 것으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님이 강림할 때 담대하고, 부끄럽지 않게 된다. 무슨 엄청난 일을 해서가 아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악한 자들은, 거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지금까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관점에서 썼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생활문제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성도가, 가져야 할 소망과, 성결한 삶에 대해 밝힌다. 하나님의 자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다(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이데테, 호라오) ‘느끼다, 알라.’의 명령법이다.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을 베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어떠한’(포타펜, 포타포스)은, ‘포테’(언제) + ‘푸’(어디, 어떤 장소) = ‘어떤 종류의, 무엇이든지’다. 놀람과 감탄을 나타내는 단어다.
‘어떠한 사랑’은, 우리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 엄청난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죄로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 보여주는 말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님을 희생함으로,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결과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은 것이 아니다. 오직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테크나 데우)는, 법적으로 받아들인 ‘양자’다. ‘친자’는 ‘휘오스’다. 성도들이 하나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희 막내 처제 부부는, 미국에서 내과병원장과 치과의사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람들이, 인도 산골 ‘마날리’에 가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처갓집 식구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들 부부를 미쳤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돈 잘 벌어서, 선교하면 되지, 뭘 저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분명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삶을 살 수 있다.
‘알지’(에그노, 기노스코의 부정과거다)는,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할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알지 못했다. (요7:41中)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면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마26:63下)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64上)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하자, 대제사장은 (25中-26)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했고, 결국 처형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함으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씀해 준다.
2. 우리는 장래에,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된다(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친밀함을 드러내며,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며,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지만, 지상에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나타나시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된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지금’과, ‘장래’라는 단어를, 대조하며 강조했다. ‘지금’(뉜)은, 성도가 경험하는 구원의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현재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소유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가, 성도들의 현재 삶에, 늘 나타난다. ‘장래에 …될 것은’(에소메, 에이미의 미래형) 구원받은 성도들의, 종말적 미래를 나타낸다. 성도는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요한은, 장래의 모습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 아니다’(우포)는, ‘우’(아니다) + ‘-포(스)’(아직, 어떻게든지, 여하튼) = 여하튼 지금은, 영광스런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타나지’(에파네로)는 ‘ㅍ화네로오’(드러내다, 밝히 보이다.)이다. 가려져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지막이 어떠한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는, 모두 알게 된다. 이를 신학적으로, ‘이미(already)’와 ‘아직’(yet)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의인이지만, ‘아직’ 완전한 의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강림한 이후,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고, 주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다. 그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볼 수 있다(고전13:12). 우리가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화는 시작되고, 구원이 완성된다.
그 때 성도들의 모습이, 어떨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아마 변화 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빛나는, 변모된 모습과, 유사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마17:2).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자는, 즉각적으로 완전한 자로 변모된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지금 완전하게 변했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완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지적하고,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에, 완전한 상태로 변한다. 영지주의자들만 독특한 신적 지식과 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교리의 거짓임을 밝히며,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완전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고난의 현장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영광스런 모습을 바라보며 종말론적 소망을 갖게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의 사역을 감당하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권세를 받았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동일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성도는,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 완전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모습, 변화산상의 모습이 되는 날까지, 성도는 이런 소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인내함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 현재적인 고난을 굳건히, 견뎌내야 한다는 말이다.
3. 천국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이 땅에서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저 천국을 바라보는 자는, 주님의 깨끗함같이, 현재의 삶이, 깨끗해야 한다. 사랑하는 주님이, 원하기 때문이다.
‘소망’(엘피스)은 ‘기대, 확신’으로,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다. 현재의 삶에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들 중에도, 약속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인내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를 따라 거룩해지고, 영화롭게 변모될 것을, 기대하는 소망을 가리킨다.
‘깨끗하게 하다.’(하그니조)는 ‘청결하게 하다, 신성하게 하다.’로, 깨끗함과 거룩함을 위해, 행하는 행위를 뜻한다. 마지막에 주님을, 영광스럽게 대면할 것을 기대하는 성도들은, 구약의 구별된 자들이, 결례를 행하듯이 거룩함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가, 죄로부터 떠나,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삶이라고, 또 말했다. 이런 신앙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기 때문이다. ‘깨끗’(하그노스)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처녀와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정결, 순전, 성결’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같이, 우리도 정결해야 함을, 보여준다. 모든 성도들이, 죄를 멀리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이, 영광의 몸이 될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 주께서 다시 오면, 주님의 몸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변할,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깨끗한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깨끗하게 해야 된다는 말씀이다. 깨끗한 손을 가진 사람과, 악수하려면 어떠해야 하나? 내 손 역시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 주눅 들지 않는다.
더러운 것이 묻은 손으로는, 악수를 못한다. 상대방이 악수를 청해도, 양심상 손을 내밀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더러우면, 주님이 다시 온다 할지라도, 주님을 기쁘게 영접할 수 없다. 거룩한 주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그 날이 되면 죄인들은, 주님이 지옥으로 가라고 명하지 않아도 너무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만다. 자신이 천국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날에 거룩한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면, 스스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신랑과 신부는 상대방을, 자기 동반자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이, 다른 여자들을 마음에 두면, 안 된다. 반대로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가, 다른 남자들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들로 비유되는, 성도들 역시,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유지해야 한다. 예수님이 다시 온다는, 희망과 기다림에 가득 찬 성도는, 결코 이 세상과 짝이 되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선언임과 동시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날마다 끊임없이 애쓰고, 힘써야 한다는 명령이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이다.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자기 이름을 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절대로 복음에 헌신할 수 없다. 주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범죄 할 수밖에 없고, 순결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둔 자들이기에, 이 땅에서 죄를 짓지 않고, 예수님을 닮은,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나눔도, 베품도, 섬기도, 용서도, 주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이 할 수 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그러면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깨끗해질 수 있다(딤전4:5). 거룩해질 수 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길은,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다. 말씀은 심령의 거울이다. 말씀을 가까이하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교훈 받게 된다.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교훈 받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공수표가 된다. 말씀대로 살 능력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병행되지 못하면, 거룩한 삶을 만들어낼 수 없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소망이 의미가 있다. 그래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담대히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 영화롭게 변화되어, 영원한의 삶을 살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서, 자기 자녀로 삼아주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 드리자. 자격 없는 나를 위하여, 그 놀라운 일을 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날마다 감격의 찬양을 드리고, 헌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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