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9월 24일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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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
요한은 하나님과의 사귐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죄가 방해한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사귐을 방해한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진 사람은 증거가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계명을 지킨다. 영혼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다.
자신의 영적수준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행동한다. 갓난아이인지, 소년인지, 청년의 신앙인지, 아비의 신앙인지를 생각하라 했다. 오늘 본문은,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답변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생각과 정반대편에 있기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가 가야 할 길이요, 사는 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1.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메 아가파테) -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다.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이 말했다.
요한복음에 39번, 요한일서에 30번, 요한이서에 4번, 요한삼서에 5번, 요한계시록에 6번, 모두 84번을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단어보다 중요한 것이 문장을 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똑같은 단어가 문장 중에서 얼마든지, 그 의미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쉰 천지 성경공부가, 가장 잘못된 엉터리 성경공부다.
(1) ‘세상’(코스모스)은 무엇인가?
(15-17)까지, ‘세상’이라는 단어가, 6번 등장한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세상이라고 한다. 하나님 창조한 ‘우주’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지 못하면, 엉뚱하게 세상을 배척하는, 이원론으로 발달하게 된다. 이런 오해가 생기게 된 이유는, 성경에 2종류의 세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세계, 즉 우주를 지칭하는 세상이다. 이럴 때 세상은, 하나님이 피조한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피조 세계로서의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TV도 영화도 안 보고, 대중가요를 들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이 세상을 떠나, 경건한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더 극단으로 가면, 반문화주의가 형성된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말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부인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 위배된다.
② 부정적인 세상으로, 세상 정신으로서의 세상이다. (창11장)에, 시날 평지에 당대의 영웅인, 니므롯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뭉쳤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높아지자, 이름을 내자, 자력으로 흩어짐을 면하자면서, 탑을 쌓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탑 쌓는 모습을 보러 내려와서, 그들의 행동을 보고,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 그래서 그 탑의 이름을 바벨, 즉 혼잡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혼잡하게 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은, 이런 타락한 인간들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정신, 마음이다. 이러한 정신과 욕망의 세계를, 세상이라고 한다.
바로 이렇게 타락한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삼킬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우리의 본성 속에는, 이런 세상 정신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탄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교묘하게 건드려서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한다.
요한이, 직장, 학교, 가정, 교회를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받는, 질서 있는 체제를 말한다.
(2) 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전부 ‘아가파오’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사랑함은 없다는 말이다. (약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믿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옴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으로, 다시는 정죄 없는, 사죄의 은총을 입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함으로, 우리는 사단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다.”면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범죄 하면, 그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죄의 종이 될 수 있나?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독생자까지 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소중히 사람이라면,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린다. 그러지 않고, 세상을 계속 사랑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과는 멀어진다.
2. 세상을 사랑하는 증거들(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을 사랑하는 예를 3가지로 말했다.
① 육신의 정욕이다. ‘육신’(사르코스)은, 인간의 육체를 의미하나, 본문에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말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정욕(에피미아) 에피(위에) + 뒤모스(욕정, 거친 숨) ← (뒤오, 거친 숨을 쉬다, 달려들다.)에서 왔다. 간절한 갈망, 끊임없는 동경을 지칭하는 말이다. 육체적인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갈망하는 인생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기쁨을 위한다.
② 안목의 정욕이다. ‘안목’(옾살모스)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육신의 욕심을 끌어당기는 속성이 있다. 안목의 정욕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마6:22-23)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단순히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끝없는 욕심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눈이 나쁘다는 말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안목의 정욕을, 잘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간이다. 원래 욕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날 산 외투와, 많은 돈에 눈이 돌아가, 죄를 범하고 말았다. 보게 됨으로, 범죄 하게 되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관심을 갖을수록, 점점 더 끌리게 된다. ‘이 정도면 세상 것은 충분히 취했으니, 이제는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자.’ 이렇게 금방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음란한 영화를 보고, 죄를 품으면, 안목의 정욕에 노예가 된다.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훔쳐보는 관음증은 죄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찾아오는 인간의 모든 갈망을 말한다. 그것이 돈일수도 있고, 명예 일수도 있고, 정욕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어떤 물건을 사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갖고 싶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③ 이생의 자랑이다. ‘이생’(비오스)은, ‘생명, 현재 존재하는, 생활’을 말한다. ‘자랑’(알라조네이아) ‘자만, 거만, 허풍’을 말한다. 세상적인 물질과 명성을 과대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하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유한한 인생을 자랑함을 이생의 자랑이라고 한다. 영원하지 않은 이 땅의 생명이, 바로 이생이다. 그러니까 이생의 자랑은, 별 볼일 없는 자랑을 말한다. 명성을 자랑하고, 직업을 자랑하고, 수입을 자랑하고, 떠벌이는 것이다. 특히 자랑에, 과장이 섞여있다는 의미다. 공허한 자랑이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떠벌인다. 허탄한 자랑이다. 부끄럽고 공허한 인생들이 하는 자랑이다. 돈 자랑하는 자가, 바로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좋은 차 자랑, 직업 자랑, 다 허탄한 것이다. 왜 그런가?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로부터’(에크)는, 기원을 나타낸다. ‘에크’를 사용하여, 앞에서 말한 3가지 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3.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간다(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전부 지나가는 것들이다. 세상과 정욕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지나간다는 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분명하게 시작과 끝이 있다고 말씀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영원한 것은 없다. 다 지나간다. 인생을 걸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죽도록 욕심내서, 인생을 맞바꿀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지나간다. 영원히 젊지 않다. 돈도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10년이 지나면 외면당하게 마련이다. 지나가는 것이다. 명품, 좋은 차, 명성…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 지나가는 것들을 사랑하다가, 인생을 끝마치게 되면, 허무함 밖에는 남지 않는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지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영원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인생을 걸지 말라. 그런 것들을 사랑하다가, 후회로 인생을, 마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것에 인생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지나가는 것들로, 영원한 가치에 투자하는 지혜를, 갖기 바란다. 아침안개와 같은 인생이다. 육신의 정욕도 지나가고, 안목의 정욕도 지나간다.
어제 그렇게 욕심내던 것이, 오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가치는, 지나가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기 바란다. 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정욕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지나가는 것들을 사랑하느라, 주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영원한 천국과,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하다고 말씀한다. 영원히 천국에서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 문제의 핵심은,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나가는 것들을 사랑하느라, 영원한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 가치를 쫓느라, 하나님의 가치를 외면하지는 않는가? 지나가는 것에, 인생을 걸지 말라. 교회안의 불신자가 되어서, 교회에 세상 정신을 실어 나르며, 지나가는 것들을 붙잡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말라.
우리 인생도 지나가고, 젊음도 명성도, 돈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 영원한 가치에 헌신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이 값진 인생으로 사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세상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사랑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이, 목적하는 것은, 모두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이다.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고, 외적인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뜻대로, 순종할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정욕은 세상에 있는 것을, 자신의 소원을 삼은 것을 뜻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기도라고 했다. 즉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씀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존귀함을, 멸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세상은 흘러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이, 잠시 후면 사라질 것들에 불과하다.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하다.
그런데 세상 것으로, 이생의 자랑을 삼으려 하고, 세상 것들을 소유함으로서, 자신을 존귀하게 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씀드린다. 성도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세상 것들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다. 세상 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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