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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7년 9월 17일 - 신앙의 단계(요일2:12-14)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7-09-17
  첨부파일:   신앙의 단계.hwp(21K)

신앙의 단계(요일2:12-14)

지난 주 말씀은, 구약의 옛 계명과 신약의 새 계명은, 모두 하나님의 근본마음이 담겨있는, 사랑이라고 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다. 요한은 자신이 쓰는 말씀이, 새 계명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는데,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고 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새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나면, 금방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에서 청년으로, 장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호칭, 자녀들,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로, 다르게 부르고 있다.

1. 자녀들아(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한 사도는 신자를 자녀들아(테크니아), 아비들아(파테레스), 청년들아’(네이니스코이), 3가지 호칭으로 불렀다.

이는 신자의 신앙수준을 말하지만, 신앙의 높고 낮은 직분이 아니라, 깨달음과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은 성도들을, ‘자녀들아!’라고 불렀다. 아직 복음에, 성숙하지 못한 성도를, 일컫는 말씀이다. 요한이 볼 때,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교인들이 있었다.

죄는 정말 무섭다. 죄를 지으면,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도, 조사를 받고, 옥에 갇힐 수 있다. 너희에게 편지를 쓴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받았다고 했다. ‘사함을 받았음이요’(아피에미의 완료수동), ‘아포’(멀리, 분리) + 히에미(보내다, 용서하다) = 죄를 완전히 분리시켜서, 멀리 추방하는 것을 뜻이다.

죄가 용서받았음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평생 죄의 멍에가 따라다닌다. 지난날 어떻게 살았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두 다 지워준다, 멀리 집어던진다는 말이다. 특별한 때에, 사면 받으면, 전과기록이 말소되지만, 추적하면 또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면은, 아무리 전과조회를 해도, 완벽하게 지워졌기에, 추적할 수 없다. 따라서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정말 중요하다. 믿음의 시작은, 죄 사함으로 시작된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먼저 이해해야 한다.

죄를 지으면 죽는다(6:23). 생명은 피에 있다(17:11). 죄를 지으면, 피를 흘리고,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만일 죄를 씻고 싶다면, 네가 죽기 싫으면, 죄 없는 사람이, 너를 대신 죽어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를 짓고 죽을 사람들을 살릴 방법을 택했다.

하나님은 일찍부터,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 대신에 죽을 수 있는, 짐승을 허락했다.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고, 죽을 죄인도 살려주었다.

그러나 아무 짐승이나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지정한 짐승이라야 했다. 보통 소, , 염소, 3가지였고, 반드시 흠 없고, 완벽한 짐승이어야 했다. 눈이 빠지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은, 대신 죽을 수 없었다. 완벽한 짐승이라야, 우리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고 죽을 수 있는, 속죄 제물이 될 수 있다.

생명은 피에 있고, 피가 죄를 속하기에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피를 짐승의 피로 대치하여, 일시적으로 용서받았다.

아무리 흠 없는 짐승을 많이 죽여도, 죄지을 때마다 끌고 가야 했다.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또 죄짓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았다. 짐승이 애처로워서, 죄지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똑같은 짓을 계속하니까, 마음에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않았다. 계속 짐승들이 죽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매번 죄지을 때마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고, 단 한번 영원히, 그 죄를 다 용서할 수 있는 피를 준비했다. 단순히 죄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마음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 피를, 하나님이 준비했다. 이런 놀라운 조건을 갖춘 피가, 천하에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하기 위한 피는, 너무 좋은 피 이기에, 짐승의 피는 안 되고, 죄지은 인간의 피도 안 된다. 피라고 다 피가 아니다. 조건이 맞아야 한다. 아무리 피가 소중하다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피를 맞을 사람이 누가 있나요? 죄가 없는 분은, 영원한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기에 죽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으려면, 인간으로 와야만 했다. 죄가 없어야 하고, 사람이라야 죽을 수 있기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었다.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언약의 피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죽어주면, 그 피를 믿고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마.”라고 약속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해주는 복음,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주마. 이것이 십자가요, 예수님의 피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기에, 믿고 내 삶에 받아들여야 된다.

2. 아비들아(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파테레스), 부모를 말한다. 영적으로 자녀를 낳는, 부모와 같은 신앙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식이, 어떤 지식인가? 물리학에 대한 지식인가? 의학에 대한 지식인가? 동식물에 대한 지식인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그래서 칼빈은 세상에서 가장 큰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다.

100년 전의 일도, 1,000년 전의 일도,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데, 우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분, 알기를 포기했던 분인데, 그 분을 알았다. 자기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인데, 어떻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겠는가?

태초부터(아프 아르케), 이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계시던 분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 역사나 과학의 신비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태초부터 계신, 역사의 주인공을 알 수 있나?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이, 예수님으로 성육신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이런 거짓 교리가 흔한 때에 태초부터 계신 이그리스도를 말해,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는가?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자를 알았다고 했다. ‘알았음이요’(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다. 현재까지 계속되어서,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안다’(기노스코),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특히 구약의 안다’(야다), 경험적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는가? 우리보다, 더 권력이 있는 자들도 모르는 하나님을, 우리보다 훨씬 부자도 모르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잘 알고, 얼마나 가까운 사인가? 우리가 어떤 권력자를 알고 있는가? 얼마나 잘 알고 있나?

우리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밤중이라도 달려와서, 돌보아 주고, 우리를 위해 장관직을 포기하고, 달려와서, 돌보아 줄 사이인가? 그래서 그를 안다고 자랑하고, 고위층을 안다고 뽐낼 수 있는가?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분도 잘 알고 있는가?

아이들의 믿음도 아버지를 알았다고 하지만, 아비들과 아이들의 안다는 말은, 서로 의미가 다르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를 안다. 저분들이 우리 엄마 아빠이고, 나를 낳고 길러주고, 사랑해 주는 줄 안다. 그러나 부모님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그 사랑과 마음이 어떠한지, 깊이 깨닫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름대로,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지만, 그저 어린아이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면, 부모님에 대해 밝히 알 수 있다. 부모님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어떤 마음과 성품을 가졌는지 잘 알고, 부모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깊이 느낀다.

영적으로도 아이들이, 아버지를 알았음은, 신앙의 기초를 알았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됨과,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깨달아 알고, 영접했다는 말이다. 반면에 아비들이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깊은 것을 깨달았고,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했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자기 안에도 사랑이 충만하면, 사랑 가운데 행하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을, 정말 잘 알았기에, 천지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계시 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서, 보통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들도 알고,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것까지 순종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벗’(2:23)이라고, 깊은 사귐을 가졌다.

3. 청년들아(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청년들아’(네아니스코이) 40살 이하의 젊은이를 말한다. ‘악한 자’(포네론), 남을 타락하게 만드는, 악령을 인격화하여 표현했다.

악령은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 우리의 훼방자요, 원수였는데 우리가 이겼다. 언제 우리가 악한 자를 이겼나? 우리는 연약하여, 늘 쓰러지고 넘어지며, 마귀의 유혹을 받는 자들이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악한 자를 이겼다는 말씀인가?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우리는 신부로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한 몸을 이루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을 이루었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며,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함으로 악한 자를 이겼다. 그래서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면서, 앞에 간다. 주님이 이긴 싸움을, 우리는 따라가면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앞에서 빛 가운데 거한다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했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네니케카테, 니카오)의 현재 완료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승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가 승리하고,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리스도로 승리했고(10:18),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 우리는 죄를 버리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데, 자기 안에 어떤 죄악이 발견되어도, 살짝 덮어두고 넘어가려고 하기에,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예수님으로 죄 사함을 얻음은, 신앙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자녀로 표현했고,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비로 표현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자를 이기는 것을, 청년으로 표현함은, 청년의 힘을 의미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악한 자를 이기는 자로, 살지 못한다면, 형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악한 자를 이기려면, 말씀이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마귀와 싸우려고 하면, 무너지게 된다. 마귀는 주님과 우리가 떨어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말씀에 거해야, 승리자가 된다. 사랑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나의 힘으로, 실천할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자로, 사랑하게 된다.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긴 자이다. 어떠한 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천여부를 보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다.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몫이나, 지키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지 말라. 그렇다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분이, 우리 안에게 일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랑을 위해, 더욱 성장하자! 말씀을 붙들고, 주님을 떠나지 말고, 항상 거하여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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