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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7년 9월 10일 - 옛 계명과 새 계명(요일2:7-11)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7-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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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계명과 새 계명(요일2:7-1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고,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나님 안에 산다는 자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과 사귀는 자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하기에, 계명을 지키는 삶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가 되어,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진다. 빛 가운데 있으면, 어둠과 죄 가운데 헤매지 않는다.

1. 형제를 사랑하라는 일관된 계명(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스), 요한이 즐겨 쓰는 호칭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자라는 말이다. 요한은 계명을 말했는데 계명’(엔톨레), 단수 하나. 계명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하나로 요약하였다.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했다.

하나님은 계명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라고 했다. 요한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헬라어에 새롭다는 말이, 2개가 있다.

네오스현재 있는 것을 가지고, 좀 더 새롭게 고치는 정도의, 갱신을 말한다(2:22).

카이노스새로운 생명, 이 단어는 무에서 유로, 즉 구약의 창조하다’(바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새 계명이라 할 때, 사용된 새로운(카이노스).

이 말은 시간적인 면에서, 새로워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새로워졌음을 말한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이때 사용된 새로운카이노스. 새로운 생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이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뼈 속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며, 세계관이 싹 바뀌어야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새 노래, 즉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늘 보좌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이 부르는, 새 노래도 카이노스.

한편 들은 바’(에쿠사테, 부정 과거),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말한다. 이 사랑의 계명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했다(13:34). 요한은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가 되기 원한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했다. 이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옛 계명과 다른 새 계명인가?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다. 이미 구약에 주어진 계명이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도 바울도,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마땅한 삶의 자세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었던 옛 계명인데,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새 계명이 될 수 있나?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2. 다시 내가 새 계명을 쓴다(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이 벌써 비침이니라.” 여기서 계명,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 들었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새 계명이다. 요한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했다. ‘새 계명, 성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사도 요한이 사용했다(13:34, 요일2:7, 8, 요이1:5). 새 계명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계명, 생명의 계명이다. 이미 하나님 말씀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새 계명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 것과,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 의도는, 전혀 다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사랑은,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냄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전에 우리는, 계명은 알고 있지만, 그 명령대로 살 수 없던 사람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지만, 이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한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주고, 자신이 행했던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보여주었다(4:9). 예수님이 먼저 모범을 보이고, 모든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의 계명을 이루게 역사한다.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그 안에너희 안에 있는 자에게, 다시 쓴다는 뜻이다.

우리는 계명을 따라 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이루었기에, 새 계명이 되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을 얻은 너희는, 예수님 안에서 행할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 계명의 의미이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존재인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나?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따라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른 점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계명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속에 내가 살아있는데,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나?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 우리의 죄인 됨과 악함과 불순종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보이는 열매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계명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난다.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을 스스로 절감해야 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말도,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지킬 수 있는 자를 향해서, 지키라고 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절대로 지킬 수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빛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새 계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을 비췄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다.

비침이니라.’(파이네이, 파이노), 빛인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었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춘다는 의미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오는 세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은, 기껏해야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는 것이었다. 그것도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 놓은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이 사랑한 대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가? 이웃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다.

3.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는 자다(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빛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을 갖는 자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모순된 주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사귐을, 맺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그 형제,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미움(미손, 미세오의 분사)싫어하다, 조금 사랑하다.’이다.

이 험악한 세상을 살면서, 미움은 끝이 없다. 이를 갈며 증오하자면, 한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인간 사랑을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 조명되지 않아, 어둠에 있는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나타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따라서 나는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라고 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 계속 미워하는 자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 사랑, 인간 사랑을 하지 아니한 자라고, 풀이할 수 있다.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말이다.

(10-11)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하고, 공동체에서 떠났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특별한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을, 거부하고 미워했다. 이런 그들의 상태를 어둠에 있고,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어둠 중에 눈이 멀어, 영적인 방향 감각을 상실해, 방황하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아가폰, 아가파오의 분사) ‘거리낌’(스칸달론)이 없다. 거리낌은 , 올가미, 걸림돌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거하기에, 남을 쓰러뜨리려 하는, 거리낌이 없다. 빛 가운데 살면서, 빛 가운데로 인도함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유언처럼 하신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멀리 있는 자들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바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 내 이웃들, 바로 내 옆에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한 직장에서 부대끼는 사람들, 내 뜻대로 살아주지 않는 가족들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질과 수준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오래 참으며 사랑했다. (고전13)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첫째 정의가 사랑은 오래참고.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향하여, 오래참고 계시는가? 그들의 배반에 대하여 오래 참았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여기에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처럼,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는 순간을, 바로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일 수 없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값으로 지불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더 많이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계산에 너무 밝고, 너무 자기중심적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걷기에,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죄를 멀리하는 삶이다. 거짓 신앙은, 죄를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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