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9월 3일 - 하나님을 안다면(요일2:3-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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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안다면(요일2:3-6)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경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다. 만일 죄를 범했다면, 예수님이 우리 대언자이니, 실망하거나 낙망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 내 죄를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의한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이 대언자로 서 있으니,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대언자로 온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 없다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 예수님을 가장 귀한, 보배로운 분으로 여긴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세상해서 왔고, 나와 사귀기를 원한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 때, 예수님이 와서, 세상에서 행한 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예수님을 모르고 믿는다면, 남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하는, 흉내에 불과할 뿐이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어떻게 검증할 수 있나?
1. 죄를 범해도 된다고, 변명하지 않는다(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계명’(엔톨레)은 구약성경에는 십계명도 포함하고(출20:2-17), 신약에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되었다(마22:37, 39)
계명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주님을 아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다. ‘지킨다.’(테레오)는 ‘계속 시선을 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한다.
‘이로서 우리가 아는 줄’(호티 에그노카멘, 완료형)는, 과거에 알던 경험이, 계속됨을 나타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한은 ‘아는’을,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지식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 관계라는 말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알 것이요’(기노스코, 알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행동, 영접하는 행동이다. 삶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구원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자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어떤 것을 깨닫는, 지식에 의한 것이 절대 아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해야 한다.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은 ‘○○을 한다고 말하면서, 무엇을 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내 뱉는 믿음의 진위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계명에 대한 이해다. 요한은 구약의 계명을, 모두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압축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모습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살인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고, 계명을 지키는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다.
2.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다(5).
“(그러나, 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러나)는, 앞 절과 상반된 진술이다. 말씀을 지키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이끈다는 말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3가지 차원에서 구별할 수 있다. ① 벌이 무서워서 순종한다. ② 나에게 유익해서 순종한다. ③ 사랑하기에 순종한다. 사랑으로 순종해야 최고다.
예수님을 아는 신자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데, 사랑으로 온전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우리의 관심은 계명을 향할 수 있다. 계명이 무엇이든지, 지켜내겠다는 생각한다. 계명을 지켜서, 믿음을 증명하겠다는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계명을 준 것은, 자기의 죄를 알도록 주었다.
그래서 죄를 해결할 분으로 오는, 메시아를 바라보게 하려고, 계명을 준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명을 지켜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 줄로 착각했다. 계명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어려운 것만 골라서, 계명으로 정한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계명을 지킴은, 어떤 항목을 실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명이 목적하고 의도한 대로, 살아감을 뜻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서, 잘못을 깨닫고, 불의를 용서하고 해결하러 온,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역시, 실천부터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 앞에, 내가 사랑 없는 자임을 깨닫고, 심판과 멸망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볼 때, 사랑이 가능해진다. 즉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한다. ‘온전하게 되었나니’(테텔레이오타이, 성취하다, 완성하다)는, 완료 시상이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원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성취되어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지며,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사랑도 알 것이고, 당연히 예수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도 연애할 때, 그 사랑이 뜨겁기에, 상대방에게 다 맞춰 준다. 옷 색깔, 음식에 대한 취향, 상대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서, 맞추어주려고 한다. 영적인 사랑도 그렇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그대로 순종해 나가게 된다. 곧 그 계명을 지키게 된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지키라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는 것은 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3. 주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했다. ‘그의 안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말한다. 따라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 산다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의 산다고 하는 자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성도는 주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 안에 산다는 자들의 삶에는, 윤리적인 아름다운 행위가 동반된다는 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행하시는’(페리파텐센)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신 삶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는, 삶에 대한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표준이 세상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행하는 길이, 삶의 모델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삶의 모델이다. 하나님 안에 산다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생활한 것들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이 행한 대로, 할 수 있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산다고 하면 주님이 내 안에 사시기에, 주님이 사는 대로, 우리도 살게 되어 있다. 주님처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나를 이끌 때, 겸손하게 주님을 인정하게 되며, 주님이 내 안에서, 행할 수 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말씀대로 순종하면, 이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에, 예수님 안에 산다는 자는, 예수님의 능력에 붙들린 자를 뜻한다.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가 예수님이 행한 그대로, 행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행함은 사랑이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십자가에 죽기 까기 순종하게 했다. 결국 예수님 안에 거한 자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감이 마땅하다. 이것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줄로 알겠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죄를 알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말씀을 지키는 자로 살게 할 것이다. 주님 안에 사는 자는, 예전에 아무리 좋아했던 것이라도, 예수님이 싫다면, 마음에서 싫어지고, 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도, 성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욕심과, 육신의 생각을 좇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이를 거짓말이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이라면, 거룩한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
믿는 시늉만 내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악을 벗어나가려고 할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일 수 있다.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기도 하고, 점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본다. 또 어떤 사람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치우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노력해 나가면, 결국 성결을 이룰 수 있고, 성결하게 되어, 불같은 기도를 쌓으면, 권능도 행할 수 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권능을 체험하므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변화될 수 있다. 성결하여, 많은 열매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려고 한다면, 거짓말하는 자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계명을 지키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한다. 이런 모습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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