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8월 27일 - 죄와 예수 그리스도(요일2: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8-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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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예수 그리스도(요일2:1-2)
하나님은 빛이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전혀 지을 수 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것이고, 진리를 행하지 않음이다. 죄를 범하면서도, 나는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단 영지주의자들과 같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그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 성도가 범죄 하면 안 되지만,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이라는 형식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했다.
만일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오늘 말씀은 보면,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죄를 범하는 일을, 스스로 당연히 여긴다면 잘못이다. 물론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죄를 범하지 않도록 썼다고 했고, 죄를 지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씀한다.
1. 죄를 범하지 않도록 썼다(1上).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자녀’(테크니아, 테크니온)는, ‘육아, 어린 아이’다. (요13:33)에서는 “작은 자들아…”라고 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순교하지 않고, 장수한 제자는 사도 요한뿐이다. 그는 많은 박해와 고난 중에서도, 사명을 잘 감당했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나이가 많았고, 신앙의 연륜이 매우 높았다. 연로한 사도 요한은, 영적인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애정 어린 자녀들로 여겼다.
아버지의 모습으로, 영적 자녀인 수신자들에게,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하게 말한다. ‘이것을’ 쓴 이유가, 너희 성도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다. 1장에서 말씀한 것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킨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착각했다. 요한은 본서를 기록한 목적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지속하기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고 했다.
우리는 죄를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성경은 죄를 알게 한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죄를 물마시듯 마시고, 음식 먹듯 먹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죄에 대한 언급하기를 회피한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신자를 너무 의기소침한 자로 만든다고 한다. 죄의 문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사람이 되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될수록 죄를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부적응, 부조화, 상처, 환자라는 말로, 죄라는 말을 대신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죄인 된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의인되었음을 알고, 감사와 은혜를 깊이 누려야 한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죄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언짢아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인간의 자존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죄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등이 죄다. 하나님께 불순종이 죄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죄다. 불의를 행하는 것이 죄다. 불의는 옳지 않는 것, 윤리적으로 잘 못된 것이 죄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 죄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다. 이러한 죄들을 범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이,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가 될 수 있다. 죄를 멀리하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중에는,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없다.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없으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면,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는 자신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죄의 그림자가, 보이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했다. 우리가 이렇게 빛에 거하는 자라면, 작은 더러움도 쉽게 발견한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큰 더러움도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은 원칙적으로, 죄를 범할 수 없고, 또 죄를 범해서도 안 된지만,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 자기 비하에 빠져 절망해서는 안 된다.
2. 죄의 해결책은 없나?(1中).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죄를 범했을 때, 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죄 문제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한다. 죄를 범한 자신이,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죄로, 하나님께 벌 받을 것만 염두에 둔다. 또 죄에 대해 핑계를 대면서, 죄의 책임은, 다른 무엇인가에 전가시키는 자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교묘히 이용하여, 아예 죄를 당연히 여긴다.
인간은 연약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이용하여, 죄를 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죄에 대한 그 어떤 감각도 없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어 준다는 말씀을 이용하면서, 죄를 짓고 회개만 하면, 모든 죄가 해결된다고 한다. 따라서 죄의 문제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공의로운 심판자인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때 우리를 위해 중보 하는 의로운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대언자(파라클레토스)는 ‘파라’(곁에) + 칼레오(부르다) = 곁으로 부르는 자, 불린 자이다. 요한복음에는 ‘보혜사’(14:26, 15:26, 16:7)라고 번역하였다.
요한복음에는 성령님도 ‘다른 보혜사’(14:16)로 표현했다. 법적용어를 썼다. 심판의 자리에서 변호사가 된다는 말이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정죄(유죄)한다. 그때 예수님은 대언자(변호사)가 되어 성도들을 변호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에서 벗어나고, 큰 위로가 된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기에, 변호사로서의 자격의 적법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을 단순히 소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인간은 분명히,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심판의 굴레를 바라보는 가운데, 어떻게 해서 해소되었는지 생각하라는 뜻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우리의 대언자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의롭게 만들기 위해 오셨다.
義는 양(羊)을 위에 쓰고, 그 밑에 아(我)를 썼다. 하나님의 어린양 되는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아갈 때,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게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보면,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다 해결해 주었다. 이것은 은총이고, 선물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 변론할 수가 없다. 애당초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불의한 우리에게는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3.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인 예수(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말한다. 죄를 위한(페리) ‘~에 대하여, 위하여’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화목제물’(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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