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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7년 8월 20일 - 빛 가운데 사귀라(요일1:5-10)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7-08-20

빛 가운데 사귀라(요일1:5-10)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성공이 온다. 이 세상을 살면서,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 때 행복하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귀는 대상을 잘 알아야만 한다. 그때 사귐을 더욱 깊어지고, 결실을 맺게 된다.

상대방을 잘 알아야, 그 앞에 합당한 반응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와서, 목숨을 주고 피 흘려주셨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바른 사귐을 갖으려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창조주와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면서 살면, 행복하고 승리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섭섭함은, 서로 상대방을, 잘 모르는 데서 나타난다.

1. 하나님은 빛이시다(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 했다.

요한은 사람에게, 들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인 예수님에게 들었다. 하늘에 속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직접 하늘의 소식을 전했다. 사도 요한이 연구하고,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상상을 통해 말씀한 것도 아니다. 직접 하늘의 주인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했다.

요한이 듣고 전한소식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빛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성자체가 빛이라는 말이다. 피조 된 빛이 아니다. 빛이 있으라고 해서, 생겨난 빛이 아니다. 생면은 빛이 비칠 때, 탄생한다. 우리의 모습을 진정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말씀하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왜 이 말씀을 붙여놓았나? 그 당시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 사람의 육신과 정신은 결합될 수 없다. 구원받은 영혼이, 몸 안에 갇혀 있기에, 육신의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구원은 구세주와 주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그를 아는 지식에 의해 주어진다. 영지주의자들만이 이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만이 빛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하나로 결합되지 못한다. 따라서 지상에 있는 예수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거나, 자녀를 낳는 것도, 환영받지 못했고, 철저한 육체적 금욕을 강조한 나머지, 홀로 산 속에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는 것을, 더 권장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육체는 죄의 도구이기에, 철저하게 자기 몸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이 미덕이었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이단 사상은 계속되었다. 성전에 올라갈 때에도,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서, 올라가다보니, 무릎이 깨지고 피를 흐르지만, 오히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순례자들이, 이 계단에다, 입맞춤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우리 육체는 학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몸이다. 그 몸이, 영과 함께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가 되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창조의 걸 작품인데, 학대하고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빛만 아니라, 어둠도 있다고 이원론을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빛은, 거룩함을 말한다. 빛의 반대는 어둠이다. 어둠은 죄를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엄청난 잘못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성도들에게, 분명히 신앙적인 정의를 내릴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선포하고, 분명하게 사족을 붙였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생명이라. 그에게는 사망이 없다. 계시록에서는 천국은 사망이 없고, 눈물이 없는 곳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인간은 생명과 죽음을 가졌고, 인간에게는 빛과 어둠의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은 빛이실 뿐만 아니라, 조금도 어둠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빛이기에, 어둠과 조금도 타협하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빛이기에,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사람은, 빛 안에 거해야만 한다고 했다. 우리가 빛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빛인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가질 수가 있다.

2. 거짓이 없어야 한다(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사상에 빠져,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배척하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래서 죄를 범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사귀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본성인 선함에, 모순되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데, 잘못된 해석으로, 죄를 짓도록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주면,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죄 된 어둠의 삶과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둠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죄악에 대해,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오늘 우리의 실수는, 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을 잊고 사는데 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우리 죄에 대해서는, 몽땅 용서하는 하나님으로만 여긴다. 십자가 앞에서,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짊어진 예수님이라도, 십자가에 죽게 할 정도로, 철저히 심판하는 하나님이다. 십자가는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이 빛이라, 우리의 행위가 다 드러나기에, 주님과 사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우리가 어둠을 따르지 않게 된다.

빛이 오면 자연히, 자신의 어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회개하게 된다. 이것이 참된 교제다. 거룩한 분과 사귄다고 하면서, 잘못된 어둠 가운데 행하면서, 전혀 인식을 어둠의 일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편에서 인정할 수 없는 모습이다.

어둠에 행하면’(페리파테오), ‘페리’(대하여, 주위에, 두루) + ‘파테오’(밟다, 걷다.)여기저기 돌아다니다는 의미다. 현재형으로,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계속적인 행동을 한다는 말이다. 구원받은 자는 계속해서, 어둠에 행하면 안 된다. 최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 때, 진리 안에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빛 가운데 거룩한 삶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빛이 임하면 반드시 어둠은 물러간다. 빛의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어둠에서 떠날 때, 서로 사귐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어둠은 원수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어둠에 거하는 사람도, 원수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따라서 어둠에 거하는 사람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이는 거짓말 하는 것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하나님은 빛이기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 것이다.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은 현재형으로, 계속, 반복해서, 점차 거룩해지는 성화의 삶을 말한다. 교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점진적이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물론이고, 성도 간의 사귐이 계속 이어진다. 더욱 깊고 뜨겁게 익어가게 된다. 그 결과에 대해, 2가지로 말한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하나님이 빛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거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은,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귐을 성취한다.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함을 암시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말한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된 성품까지 깨끗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결과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비롯된다.

3. 죄를 고백하는 삶을 살라(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영지주의자, 곧 이단들은, 영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다고 가르쳤다. 이 말은 성경과는 180도 틀린 말이다.

영적지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 크게 깊이 깨닫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다. 은혜에 초기에 쓴 (고전1:1)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중반에 쓴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죽음을 앞두고 쓴 (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다.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죄의 실재에 대해, 부인하는 말이다. 죄가 없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기에,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진리의 말씀으로 비춰볼 때. 자기 죄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자백할 때, 회개할 수 있다.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거부할 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말한다. ‘사하시며’(아페)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이며 깨끗하게 카리세),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시킴을 말한다.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미쁘시고’(피스토스), 약속을 잘 지키는 신실함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죄를 범해도, 연약해서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도,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즉각 용서한다. 용서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흘려주신 사역에 근거해서, 죄를 자백함으로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교제 없이 살다보면, 죄를 범해도, 죄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대한 처방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예수의 피는, 그리스도인을 성화시키는 방편이다. 신앙이 깊어갈수록 죄에는 민감해진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붙들게 된다.

이 권능과 은혜의 피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가 있다. 그의 속죄의 피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영속적인 근거가 된다.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생활전체를 하나님과 직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인격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어, 정말 거룩해질 수 있도록 역사한다. 그리고 자백해야 한다.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동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다. 그 앞에 서면, 우리의 죄가 드러난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해야,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 모든 죄를 버리고 죄를 자백하여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누구든지 나는 죄가 없다고 하면, 그는 진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죄가 먹보다도 더 검게 있고, 바닷가의 모래알 보다 더 많은 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믿기에,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를 죄 없는 사람으로 여겨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인 된 의인이요, 의인된 죄인이다.

죄를 지었다면, 주님께 죄를 고백하라.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그 사람 앞에 고백함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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