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8월 13일 - 생명의 말씀(요일1:1-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8-13 |
첨부파일: 생명의 말씀.hwp(21K) |
생명의 말씀(요일1:1-4)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은 5권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영적인 관점에서 풀어준 요한복음과, 교회들이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한, 권면의 말씀인 요한1서, 2서, 3서, 그리고 마지막 때의 신비로운 모습을, 사진처럼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이다.
그 중에 요한1서와, 2서, 3서는, 공동서신이라 한다. 특정 교회나, 개인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전체교회를 위한 내용이다. 요한의 서신들은, 바울 서신들과 더불어, 신약에서 쌍벽을 이룬다. 바울 서신이, 그리스도교 진리의, 골격이라면, 요한 서신은 거기에 붙은, 살로 표현할 수 있다.
요한1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다. 요한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교회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교회 외부적으로는 정치와 권력, 이방 문화들이 공격해오고, 내부적으로는 잘못된 영지주의와, 각종 이단 교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가지 이유로,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
①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②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③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했다. 즉,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여,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구원의 확신을 굳게 하려는, 3가지 의도를 가지고 썼다.
1.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이래, 60여년이 지났다. 사도요한을 빼놓고, 사도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처음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데,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겼던 1세대는,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2, 3세대가, 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으며 느낀, 진리를 발견하는 감동과, 뜨거운 체험이 식었다. 간접적으로 듣기만 하고, 체험이 없는 세대였기에, 신앙의 뜨거움이 없었다. 신앙은 습관화 되었고, 타성적인 행사로 바뀌었다. 영의 소욕보다, 육신의 소욕에, 더 강하게 끌리는 유혹이었다.
또한 이단들의 가르침으로, 거룩한 생활은 싫고, 번거로운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짐이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세상을 대항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영적침체로 빠져들어, 교회는 병들고, 힘을 잃게 되었다.
세상 물결에 떠밀려가는, 성도들을 다시 살리기 위해,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전했야 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버렸음을 알고 다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영적침체에 빠진 이유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들은 생각으로만 믿었고, 생명에 대한 만남이 없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소개하였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경험한 말씀이다.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빠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세대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따라서 태초에 있는 말씀이, 어떻게 생명의 말씀이 되는지, 눈을 크게 뜨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는데, 말씀으로 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면, 그 말씀에 따라 빛이 생겼다. 이 창조의 능력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천지를 창조한 그 말씀이 하나님이며, 생명이라고 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 말씀이 육체로,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었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서, 잔잔하게 했다. 이러한 일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행함으로, 하나님임을 증언했다.
또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생명의 주인임을 증언했다. 천지를 다스리고, 생명의 주인 됨을, 예수님은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생명을 잃고, 헤매는 자들은, 생명의 예수님에게로 나와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좋아하게 된다.
우리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마음이 끌려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안다면서, 이상한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끌리지 않는가? 그래서 요한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왔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하였다.
2. 이 영원한 생명을 전한다(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인간을 쫓아냈다.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되었다. 사도들은 나타난 생명의 말씀을 증언하였다.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요, 그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전한다 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되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다.
요한은 처음에, 예수님을 좇은 제자이고, 마지막 만찬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재판받는 자리까지, 함께 간 사람이다. 물론 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그런 것이지만, 십자가의 현장까지 함께 가서, 예수님으로부터 모친 마리아를 돌볼 것을 부탁받았다(요19장).
그리고 베드로보다 앞질러서, 빈 무덤까지 달려갔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요20장). 이러한 경험을 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증언한다고 했는가? 요한1서가 기록될 때, 이단들이 많이 있었다.
영지주의자(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다. 또 가현설(영이신 하나님이, 물질적인 육체와 결합할 수 없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한과 사도들은 예수님은 실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했다.
신비주의는 사도들처럼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는 특별히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영이 특별히, 이단의 교주에게 임해서, 이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들과 사귐이 있어야,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직통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놀라운 말씀을 부어주었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함은,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벗어나지 말라고 했다. 사도들이 이렇게 전하는 이유는,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다.
사도들과의 사귐은, 사도들이 증거 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귄다.’(코이노니아)이다. 이 말은 인간생활과 가장 관계 깊은 법적 관계 ‘결혼, 사업, 우정’을 묘사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귐은 다양하게 번역된다. ‘참여(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 나누어줌, 친교, 교제, 자선’을 말한다. 세상의 그 어떤 사귐보다, 더 중요한 사귐으로,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귐이다. 그러나 이 사귐이,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처음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이 되었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 능력이나 힘으로,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게, 천사들이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기 때문이다(창3:24).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 편에서 와야만 된다. 그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 왔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고, 싫다고 배척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미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며, 생명이 그 안에 없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알고 나아와, 믿는 자들이 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속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에, 스스로 영접할 수 없다. 그래서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다.
따라서 누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자들이, 하나님께로 난 자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분이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고, 이 말씀을 듣고 따를 때, 사귐이 있게 되는 내용들이다. ‘누림’은 우리말은 ‘즐기다’는 말이지만, 원문에는 없다. (메타)‘함께 함’을 말한다.
3. 사도들은 왜, 이 사귐을 갖고자 했나?(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과의 사귐은 기쁨이다. 사도들의 기쁨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기쁨이다.
그러나 이 기쁨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기쁨이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은,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주님과 사귀는 사람들의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생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생명을 함께 나눈 사이는, 영적교제가 이어진다. 자기 신장이나, 간을 떼어 주어, 생명을 건져준 사람들을 보면, 환자와 끊임없이 사랑이 오고 간다. 예수님은 신장이나, 간을 떼어준 분이 아니다. 생명을 송두리째 내어준 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어떻게 사귐을 갖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기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생명을 같이 나눈,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사귀는 것이 기쁘지 않겠는가? 만일 예수님과 성도들과 사귀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요, 기쁨임을 다시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면,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한 후에, 승천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성령님이 임하게 되자, 이제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속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사귐이 너무 좋아서, 그 어떤 세상의 유혹과, 환난과 박해도, 빼앗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유혹과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에, 그 생명의 사귐이 있기에,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세상의 염려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도 끊어낼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과 사귐으로, 이 기쁨을 함께 맛보기를 원한다.
예수님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면, 문제 있는 신앙인이다. 성도의 기본은 사귐이다. 외적인 헌신도 필요하지만, 예수님과 사귐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도, 기도도, 어렵지 않다. (요12장)에서 예수님과 사귐이 있었던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드리는 헌신이,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면 어렵지 않다.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짐으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예수님과 사귐으로, 생명이 풍성하기를 바란다.
"
이전글 : 2017년 8월 6일 - 하나님께 영광(롬16:21-27) | |
다음글 : 2017년 8월 20일 - 빛 가운데 사귀라(요일1:5-10)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