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4월 23일 - 소망의 공동체(롬15:8-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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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공동체(롬15:8-13)
로마서를 한 달 전에 말씀했다. 그때 말씀을 보면,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말하며,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라.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분열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교회는 하나 되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 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연약한 자들을 용납해주셨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인 ‘우리’를, 구분하지 않고 받아주셨다.
그리스도가 어떠한 일을 함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받아주었나? 그분이 어떤 일을 함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주셨다. 우리가 강한 자라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받아주자.
1. 그리스도가 할례의 추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내가 말하노니’를 앞에 배치해, 이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알레이아, 진리, 참됨)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8a). ‘할례’(페리토메)는 ‘할례하다’(페리템노)에서 파생되었다. 폐리(주위, ~에 대하여) + 템노(자르다) = ‘중요 부분 주위를 잘라내다.’이다. ‘추종자’(디아코노스, 봉사자, 시중드는 사람, 종)가 되었다.
로마교회의 문제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장벽을 허물었다. 그리스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어떻게 허물었는가? 할례의 종이 됨으로, 장벽을 허물었다.
이스라엘의 육체적 특징이 할례이기에, 할례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루기 위해, 할례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유대인을 위한 종, 봉사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탄생했고, 육체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루기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 종이 되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맺은 언약의 표가 되며, 인이 된다(창17장, 롬4:11). 그리스도가 할례자의 봉사자, 종이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 언약의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 종이 되었다. ‘견고하게 하다.’는 확인하다, 이루어지다는 의미이다. 할례로 표시된 언약을,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17장)에서 말씀했다.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왔으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했다.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됨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됨은, 그를 통해 온 땅이,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세웠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베푼 종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묶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했기에, 하나님의 하나 된 백성 공동체를, 갈라놓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을 위한 종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종이 되어서, 받들고 섬겨야 한다. 확신과 습관과 기호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멸시하고, 비반하지 말고,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돕지 못할 정도로, 교만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도왔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었고, 인간 중에서도, 종이 되었다. 종보다 더 낮은 죄수, 그것도 최악의 십자가형 죄수로 낮아졌다.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낮은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다. 이처럼 우리도 낮아져서, 섬겨야 마땅하다.
2. 유대인과 이방인 구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4개의 구약성경을 인용했다.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1구절씩, 시편에서 2구절을 인용했다. 4구절 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바울이 인용한 구절들은 무엇인가?
① (시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군을 피해, 피난했다가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돌아와서 한 고백이다.
반란군을 평정하고, 왕궁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구해 준 하나님을 찬송했다. 다윗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나라들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다윗은 이 고백을 통해, 장차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때가, 올 것을 예고했다.
(10-12)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② (신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모세의 증언이다.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과 그 후손들을 위해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선을 베풀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반드시 심판받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질투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세는 민족들, 즉 이방인들을 향해서, 주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했다. 장차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암시한다.
③ (시117: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또 시인은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시인이 언급한 ‘우리’는, 문맥을 보면 유대인 뿐 아니라만, 이방인도 포함한, 하나님 백성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도,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사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는 장차, 열방을 다스릴 분이, 다윗 후손 중에서 설 것이며, 모든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을 예고했다.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 된다.
이러한 4개의 구절은, 모두 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 성경들을 가지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성취하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려고, 세상에 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소망과 등불이 되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을 나누지 말고,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권면했다.
3. 소망을 위한 기도(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모든 소망의 근원이 되는 동시에, 유일한 소망의 대상이다. 소망의 근원도 하나님이며, 우리가 바라볼 소망의 대상도, 하나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재물을, 명예에, 자식에, 소망을 두고 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지는 못한다. 우리를 세상과 내세에, 모두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오직 하나님만 유일한 소망이 대상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언제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다.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평강 충만히 하여’ 주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준다.
그러므로 성령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신뢰한다. 또한 성령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준다. 또 성령님은 성도들을, 기쁨과 평강의 띠로 묶어서, 소망이 넘치게 한다. 이러한 믿음과, 기쁨과 평강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인 본질이다.
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위해 기도했나?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음식과 날을 지키는 문제로, 서로 의견이 나뉘어져,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시, 기쁨과 평강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계속해서 원했다.
성령님은 불화와 근심으로 얼룩진, 성도들의 마음을, 기쁨과 평화로 바꾸어주는 분이다. 사단은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교회를 불화와 근심으로, 가득 채우려고 한다. 이런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평강과 소망의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성령님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입장 차이가 있을 때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바울은 견해 차이가 있는 성도들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로 구분하고,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주고, 그들의 연약한 부분을, 담당하라고 했다. 그 이유는,
①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연약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목숨을 버렸다. 믿음이 강한 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함이 마땅하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거부하고, 그들을 넘어지게 한다면,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려서, 구원한 형제를 멸망에 빠뜨리는 악한 일이다.
②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14:9).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 되어, 다스린다. 성도들은 다 주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멸시하면, 그들의 주인인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멸시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 또 주님에게는, 연약한 형제를 일으켜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연약한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용납해 주어야 한다.
③ 그리스도의 심판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그때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 주님께 자백할 것이며, 주님은 우리를 공의롭게, 심판할 것이다(14:6). 심판은 주님께 속한 것이기에, 형제를 정죄하는 일은, 주님의 심판권을 침범하는 일이다.
결론이다. 교회 안에서, 견해 차이가 있을 때의 행동 원리는 무엇인가? 교회 안에는 항상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언제든지,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갈등을 딛고, 서로 한 마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한 마음이 될 수 있나?
(1)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가 되라’고 했다. 교회는 본질적인 문제를 파괴하는 일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믿음의 고백들(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부활, 영생 등)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면, 교회는 생명을 걸고 싸워서, 기독교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 이처럼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나는 이단 사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배격하고 싸워야 한다.
(2) 기독교의 본질과 관계없는, 사소한 문제(음식이나, 날을 지키는 일과 같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라 해결하라고 했다. ① 각자 자신의 신앙양심을 따라 행동하라(14:23).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 양심을 따른다면, 하나님이 그 행동을 받아줄 것이다.
② 사랑을 따라 행동할 것(14:15).
사랑의 원칙이다. 자기주장이 맞는다고 생각되어도, 다른 형제에게 자기 입장을 강요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강요는,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들을, 어려움에 빠질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기보다, 다른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입장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강한 형제는, 약한 형제를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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