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4월 16일 - 예수님은 부활했다(고전15:1-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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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활했다(고전15:1-8)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은 성도가 될 수 없다.
(고전15:12中)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다. 문제는 자신들의 몸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데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유행했던, 헬라철학의 영향 때문이었다. 바울은 헬라철학의 중심지인 아덴에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다.
그곳의 철학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했다. 그러나 (행17:32-33)을 보면, 그들이 조롱하며 믿지 않기에 떠났다. 헬라철학은 이원론으로, 사람을 영과 육으로 구분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몸의 부활은, 악한 육이 부활함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믿었지만, 자기들의 악한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을 믿기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몸의 부활을 잘못 이해했다. 우리 육체가 그대로,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변화된 몸, 신령한 몸,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한다. 이 사실을 (고전15장)에서 자세히 밝혔다.
우리 몸의 부활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해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면, 우리 몸도 부활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 부활의 믿음과 소망이, 더욱 확고해지기를 바란다.
1.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주님 안에서 부르는 호칭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바울이 고린도에 있었을 때, 전했던 복음을 상기시켰다.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했다.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아들임으로, 구원받았다. 그들은 복음 가운데 서서, 복음을 굳게 지켰고, 계속해서 믿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 물론 그들 주변에는, 헛되이 믿은 사람들도 있었다.
(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기쁘고도, 복된 소식이 되는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 가운데 섰다.’ 복음을 받고, 굳게 지키고, 진실 되게 믿어, 구원 받았다.
(고전6:9-11) 말씀같이, 불의한 자,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들을 구원받은 성도로,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누가 그들의 삶을, 바꿔 놓았나? 살아계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러니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그들 가운데 역사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존재하는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다. 이는 사탄이, 사람들의 구원을 막으려하는 짓이다. 그러나 지난 이 천 년 동안,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흥하면서, 오늘까지 존재하고 있다. 교회는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 준, 복음을 받아서, 복음 가운데 서 있다. 교회는 복음을 굳게 지키며, 믿고 있다. 따라서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복음의 본질,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다.
2.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내가 받은 것을’ 복음은 바울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복음을 받았을 뿐이다. 누구에게서 복음을 받았나? (갈1:11-12) 말씀처럼, 바울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다. 예수님에게서 직접 받았다.
(고전11:23)에서 바울은, 성찬에 관한 말씀을 하면서도, 자신이 그 말씀을 예수님에게서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받은 복음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린도에서 전했다.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복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밝혔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그리스도는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목적이며, 십자가의 의미이다. 아울러 예수님은 장사 지낸바 되었다. 무덤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잠시 정신을 읽고, 기절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완전히 숨을 거두셨다. 말하자면 이것은, 완전한 사망의 증거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장사지낸바 된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었다. 성경대로 된 것이다. 성경은 곧 구약성경은, 예수님이 대속의 죽임을 당할 것과, 장사 지낸 바 될 것을, 이미 자세하게 말씀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사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이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보다, 7백년이나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장사 지낸 바 될 것을 말씀했다. 따라서 성경대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
(4)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의 복음이 새롭게 만들어져서, 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다 말씀해놓았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베드로는 (행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는 (시16:10)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막12:10)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시118:22) 말씀을 인용했다.
아울러 예수님은 (마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때도 예수님은 성경을 들어,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밝혔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은 것처럼, 성경대로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
3.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우선 본문을 보면, ‘보이시다.’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아무나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며, 보여야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몰라보았다.
또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본문 말씀처럼, 먼저 예수님은 게바, 베드로에게 보이셨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심히 통곡했다.
아마 예수님은, 상심에 빠진 베드로를 위로하기 위해, 먼저 그에게 보였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이처럼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먼저, 게바, 곧 시몬 베드로에게 보이셨다.
그 후 예수님은, 12제자에게 보이셨다. 이때는 가룟 유다가 빠지고, 또 도마도 처음에는 없었기에 정확하게 말하면 10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둘이라고 표현한 것은, 열둘이 예수님의 제자들, 곧 사도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마28:10, 16)절 말씀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가셨다. 그 곳에서, 제자들을 만나셨다. 그 때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을 것이다.
열두 제자가 양질의 증인이라면, 오백여 형제는 다수의 증인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25년 정도 지나서,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다. 그 사이에 오백여 형제 중에, 잠든 사람, 곧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살아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확인해볼 수 있었다.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이때의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아니었다. 이들은 둘 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요7: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처음에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남들이 다 믿는데, 가족이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부활한 예수님은 야고보에게 보이셨다. 그 후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예수님은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신 후에, 또 다시 모든 사도들에게 보이셨다. (행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부활한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도 보이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비방하며,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다. (행9장)을 보면,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갔다.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보이셨다.
그 때부터 바울은, 예수님에게 잡힌바 되어, 순교하는 날까지, 예수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칭했다. 해산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났다는 뜻이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와 같이 덜 되고, 부족한 사람에게 보이심은, 전적으로 은혜였다. 그래서 (10上)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보이신 것도, 또한 그가 사도로서 수고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확실하다.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몸도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고전15장)을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부활 신앙 위에 견실하게 서서,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으로, 모든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 수고를 칭찬하며,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행한 대로, 우리에게 상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서, 날마다 더욱 주를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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