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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7년 3월 19일 - 서로 받아주라(롬15:5-7)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7-03-19
  첨부파일:   서로 받아주라.hwp(36K)

서로 받아주라(15:5-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래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는, 일반적인 자유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죄인을 위해 희생했다. 따라서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연약한 자를 위하여, 절제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성도는, 약한 성도를 받아주고, 세워주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로 인내하고,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성도들에게, 한 가지 요청을 추가했다. 바울은 하나가 되라고 기도를 부탁하는 동시에, 하나 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고 했다.

1. 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라(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4절은 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된다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인내(휘포모네)와 위로(파라클레시스)의 하나님으로 소개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을 위로해 주며,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교회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기에, 자신과 다른 견해들을 가진 형제들을 받아주려면, 위로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 힘을 어떻게 얻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인내를, 공급받을 수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위로해 준다. 하나님 말씀은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더욱 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러면 성도들은 말씀을 통해주는 위로를 받고, 인내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기도했다.

뜻이 같이 하여’(흐로네오)생각하다, 판단하다,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이다. 성도들이 생각과 판단이, 그와 같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달라며, 하나 되도록 기도했다. 성도를 하나로 묶어주는 분은, 성령님이다. 그러므로 하나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의견이 나누어질 때에, 더욱 더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는 역사를 구해야 한다. 서로의 뜻이, 같게 하여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가 되라!’고 말했다.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때 나타난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언제든지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성도들은, 분당을 만들고,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면 안 된다.

성도들은 이러한 경우에, 자기주장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며, 모두 자기 마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도들은 견해가 다른 성도들과 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2. 하나 되어야 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한 마음은 내면이고, 한 입은 외면이다. 한 마음과 한 입이 되어야, 하나가 되어 영광 돌릴 수 있다.

마음이 없는, 한 입은 외식이다. 우리 가정과 교회는, 한 마음이 한 입이 되는가? 혹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을 위해, 다른 소리들을 내지 않는가? 왜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입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성도들이 나와 다른 의견에서도, 미워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를 때,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한 마음과 한 입이 되어야 한다.

나와 뜻이 다를 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숙한가? 성숙하지 못한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자기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다투게 되면, 성도들은 상처를 입고,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독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다투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에 큰 해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들을 용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교회는 사랑으로 화목해지고, 이웃에게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받아주고, 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들이 갈라지고,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사단은 교회들을 분열시켜서, 서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때에 바울처럼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자기입장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성도들이 자기주장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과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서로가 하나 되어서 받아주고, 뜻을 같이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하나님이 언제 영광을 받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돌아볼 때다.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가 하나될 때, 부모님은 기뻐한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나와,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기쁨과 슬픔을 나눌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다. 마치 한 집안에 형과 동생이, 웃음꽃을 피우면서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울 때, 부모님의 마음이 기쁜 것과 같다.

세상은 죄로 인해, 나누고 잘라내고 다투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받은 자들이 모여서, 서로 받아주고, 연합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한다. 세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지만,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곳이다.

교회 안에서 누가 강한 자이고, 누가 약한 자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로 구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알고 경험한 자는, 강한 자이고, 조금 알고, 경험한 자는, 약한 자다.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자는, 강한 자이고, 모르는 자는 약한 자다.

십자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의 차이로, 강함과 약함으로 구분이 된다. 법을 해석하는 데는 법리가 있다. 법속에 흐르는 정신을 말한다. 법을 만든 취지, 그 정신을 잘 살리는 것이 법리를 잘 적용하는 것이다. 법은 악은 억제하고, 선은 장려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적용할 때는, 그 법을 만든 취지를 살려서, 적용해야 한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 속에도, 의미가 있다. 희생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믿음을 판단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그 의미를 잘 알면, 믿음이 강한 자이고, 모르면 믿음이 연약한 자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차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고 살아가느냐의 차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받아줄 수 있는 자가 강한 자다.

3.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받아주라(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받아’(프로스람바노) 프로스(향하여, ~가까이에) + 람바노(꼭 붙잡다) = 가까이 꼭 붙잡아주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 일에 모범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납했고, 함께 식사를 했다. 예수님 당시에, 죄인과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일은,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자기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소외된 죄인들과 함께 해주었다. 이렇게 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서로 약한 형제들은 용납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용납하여 준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연약한 형제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자기의 죄를 아는 것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르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면, 십자가의 은혜가 크게 다가올 것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가볍게 다가온다. 예수님은 탕감을 받은, 종들의 비유로 말씀했다. (7:41-43)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믿음에 분량에 따라서, 사랑이 다르다.

많이 사랑하는 자는, 많이 탕감 받은 자이고, 적게 누리는 자는, 적게 탕감 받은 자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는 많이 탕감해 주고, 누구는 적게 탕감을 해 준다는 말이 아니다. 동일하게 탕감해 주었음에도, 각자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본문과 같은 식으로 말을 하면, 믿음이 강한 자이고, 아이처럼 적게 깨닫고, 적게 사랑하는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다.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해 본 사람과, 종노릇하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강도는 전혀 다르다. 복음이 주는 자유를 느낌이 다르기에, 감사의 차이가 다르다.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전쟁을 느끼는 감도가 왜 다른가?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종노릇을 해 보았기에,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기쁨과 감사가 크게 다가올 것이고, 안 당해 본 사람은, 감사가 작게 다가온다.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인은 죽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죄를 율법이 고발한다. 우리는 율법 앞에 서면,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죽어야 할 자구나! 그런데 성령님은, 너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여,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도는, 율법의 규례들인,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율법적 관습이 살아 있기에, 율법의 요구를 따르고자 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한다. 바울은 교회 안에, 이렇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다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날과 달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날로 살아가는 믿음이 강한 자들은, 이러한 자들을 잘 받아주고, 그들의 약점을 잘 담당해 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받아줄 수 있는 은혜를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자.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주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 세상은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로 찼다. 남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고자 한다. 자기를 위한, 자기의 왕국을 꿈꾸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살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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