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3월 12일 - 강한 자의 자세(롬15:1-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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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의 자세(롬15:1-4)
성도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형제를, 멸시하거나 정죄하면 안 된다(14장).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받아주었고, 다시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견해가 달라도 한 가족이다. 자신이 내린 그 결정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심판을 받게 된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입장을 강요하다가, 연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14:13-23). 이처럼 강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의와 평화와 기쁨을, 도모해야 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강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권면을 하고 있다.
1. 강한 자들의 자세(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원문에는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한다.’(오ㅍ헤일로)가, 제일 앞에 나와서, 강조하고 있다.
마땅히 해야 한다는 말은, 빚을 져서 꼭 갚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믿음이 강한(뒤나토스, 능력이 있는, 강한)자는,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는 자이다. 따라서 더 많이 가진 축복이, 사명이다.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듯이, 강한 자는 반드시,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 그게 강한 자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부모의 자격이 없다. 연약한 자들의 짐을, 대신 담당하지 못하는 자는, 강한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어른은 책임져야 할 것이 많고, 아이는 책임질 것이 적다. 아이는 놀아도 되지만, 어른은 놀면 안 된다.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기에, 어린 아이가 논다고 해서, 자기도 놀아서는 안 된다. 어른은 누릴 권리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져야 할 책임도 크다. 영광도 크지만 고난도 크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책임도 무거워진다. 성령의 충만해 질수록, 자기 자유와 기쁨을 포기한다. 내 맘대로 하는 자가, 강한 자가 아니고, 내 맘대로 할 수는 있지만, 약한 자(아뒤나토스, 할 수 없는 자, 무능한 자)를 위하여, 포기할 줄 아는 힘이 강함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성도를 돌보게 하려 함이다. 그래서 교회에, 각양의 은사를 주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가 마땅히 하라는 말에는, 2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바울은,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믿음이 ‘강한 자’로 취급했다. 바울은 그들의 판단이, 보다 더 건전하다는 점을 인정해 주고 있다.
(2) 바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2가지를 인정한 후에, 계속해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부탁하고 있다.
①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주어야 한다.’(1上). ‘담당하라’(바스타조)는 ‘들어 올리다, 참다, 지탱하다, 영접하다.’는 뜻이다. 문제를 들어 옮겨주고, 받아준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약한 사람들의 부족한 판단이나 생각을, 받아주고 격려하라는 말이다.
②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라.’고 했다(1下). 이 세상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서로 연약한 점을 채워가며, 세워주는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각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은사들을 주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강한 자나 약한 자가, 서로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들을 사용해서, 상대방을 세워주어야 한다. ‘손가락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양손을 벌릴 때, 한손은 나 자신이고, 나머지 한 손이, 상대방이라고 할 때, 지금까지의 교육은 ‘서로의 장점을 보고 살아라, 서로 단점보다, 장점을 보면 좋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런데 손가락의 긴 부분이, 서로의 장점으로, 우묵하게 들어간 곳이 단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서로 장점만을 보고 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손가락끼리 짝을 맞추며, 산 모양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평생 살 수가 있다면, 대단히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를 떼어 놓으려는, 악한 세력들이 있다. 이런 상태에서, 좋을 때는 좋은데, 서로 좋지 않을 때는, 완화시킬만한 힘이 없다.
그래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장점으로, 단점을 감싸주면, 손깍지 끼는 모양이 된다. 그 상태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서, 서로를 떨어뜨리려 해도, 그것을 붙잡고 있을 힘이, 생긴다는 말이다. 나의 장점으로, 단점을 덮어주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단점을 감싸서, 책임져 주라.’는 말씀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하나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좋은 것만 보다가, 나쁜 것을 보면, 서로 돌아서게 된다. 우리에게 장점을 주신 이유는, 상대방의 단점을 감싸라고 주었다.
모든 사람들은 단점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몰라?’고 한다. 그때 우리의 장점이, 그들의 단점을 감싸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큰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에서도, 장점을 보기보다는, 단점을 잘 보게 된다.
그런 단점을, 우리가 가진 장점으로 덮어주었을 때, 나만 저 사람의 단점을, 덮어준 것 같지만, 저 사람의 장점이, 나의 단점을 덮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요, 부족함이 있는 사람이다.
2. 서로가 가져야 할 자세(2).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바울은 모든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말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 빚진 자가 되었기에…)라며, 우리는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 이웃에게 다시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담당은, 받는 담당이 아니라, 주는 담당이다.
(1) 성도들은 서로 ‘이웃을 기쁘게 하라.’
우리 각 사람은, 자기보다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해야 한다. ‘기쁘게 하다’(아레스코)는 ‘일치하게 되다.’는 말이다. 이웃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만난다.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기쁘게 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제일 어려운 일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살기가 어렵다. 우선 친구가 바뀐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들이 좋아진다. 지금까지 몸담아 살아왔던 환경 속에서. 옛날처럼 그대로 살 수가 없다.
이제는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새로운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데, 서로에게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서로 기쁘게 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2) 서로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2가지를 염두 해 두어야 한다.
① 성도들은 선을 이루어야 한다. 이웃을 기쁘게 하려면, 서로 서로 ‘선(아카스, 은혜, 좋은 것, 구원)을 이루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무너지고, 쓰러지게 만들기보다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한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형제들과 함께 선한 일을 하고, 그들의 연약한 점을 세워 줄 때에, 교회는 든든히 설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과 더불어 살다가, 종들끼리 싸움이 나서, 서로 불편하게 되었다. 이때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러한 태도가 선을 이루는 태도다.
② 덕을 세워야 한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덕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함께 사는 집과 같은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도들은, 일을 추진할 때에, 선과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 한국인은, 좁은 땅에서 산업화가 이루어지니까,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원수가 되고, 적이 되었다. 그래서 독 속의 게와 같다. 항아리 속에 게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게들은 항아리 밖으로 나오려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래서 막 기어 올라간다. 그런데 한 게가 기어 올라가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붙들고, 늘어진다. 한 마리가 올라가려고 하면, 다른 한 마리가 붙들고 늘어지기에, 항아리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게는, 거의 없다. 이런 게들의 생활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함께 죽자!’이다.
우리는 함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전통에 따라, 이 교회의 운명이 달라진다. 우리가 어떤 관습을 만드느냐에 따라서, 우리 교회의 미래가 결정된다. 좋은 전통과 신앙생활을 보여주면 교회는 부흥된다. 앞으로 오는 교인들이, 모두 그런 아름다운 생활을, 본받게 되기 때문이다.
3. 사랑의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자기가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서로 선과 덕을 세우도록 부탁했다. 이제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모델로 제시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도록 허락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모든 영광을 받을 수 있지만, 결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될 것’을 포기하고, 죄인을 위해서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왔다(빌2:6-). 바울은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 (시69:9)을 인용했다.
(시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리라’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사건에서 성취된다.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이유는, 너희의 행위를 버리고, 나를 믿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너희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강한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게 되었다.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선지자 이사야는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53:6下)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했다.
이 시인과 같이 주님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무고하게 비방을 받았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정죄를 받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했다.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인내와 소망을 주려고, 이런 말씀을 주었다. 바울의 증언은, 2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① 성경이 ‘우리를 위해 주신 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위해, 기록된 말씀으로 생각하고, 그 말씀을 읽어야 한다.
②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성도의 유익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부분만 성경으로 인정하지 말고,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돕기 위한 책’이다. 성경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성경이 ‘하나님이 주신 책’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인간의 기록으로 간주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한 거룩한 책이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대신 짐을 지심으로 가게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보면서 우리 연약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러한 일에, 모범이 되는 그리스도를 통해,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길 수 있게 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주님이 나를 볼 때, 정말 기뻐할만한 모습이 나타나는가?
이와 같이 모든 성경 말씀은, 각 성도들에게 위로와 인내와 소망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거룩한 책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절하게 적용하면, 말씀이 주는 위로와 소망을, 정말 아름답게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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