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2월 26일 -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롬14:13-1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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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롬14:13-18)
바울은 앞에서, 먹는 것이나, 어떤 날 때문에,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먹는 것이나, 어떤 날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으니, 이는 감사한 일이지, 서로가 다퉈야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했다.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4가지로 말했다. ① 하나님이 그들을 이미 용납했다(3). ② 형제를 비판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다. ③ 형제끼리 비판하는 일이 옳지 않다(10上). ④ 자기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되니(10下),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자고 했다.
1. 금지해야 할 비판과, 해야 할 비판(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먼저 비판은 비판을 낳으니,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성경에는 ‘비판하다’(크리노)가,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원문에는 ‘비판하다’가 2번 나온다. 앞에 나오는 ‘비판’은, 성도가 금해야 할 비판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비판’이다. 뒤에 나오는 비판은, 성도들이 해야 할, 사랑의 비판이다. 우리 성경에는 ‘주의하다.’로 번역했다.
여기서 문맥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비판은 무엇이나?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거나, 연약한 자가, 강한 자를 비난하는 일이다. 강한 자는 누구인가? 자기주장만 하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품어주고, 세워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영웅 같은 사람과, 약자를 등쳐먹는 사람, 비열한 사람, 어떤 사람이 멋있나? 약자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약자를 보호해주는, 멋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약한 자를 괴롭히거나, 돈을 뜯어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의 비판은, 다른 사람을 시험 들게 하지 않는 비판이다.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비판과 비난이 아니라, 비판을 비판하는, 사랑의 비판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판단과, 해야 할 판단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사랑이다.
자녀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님이 얼마든지,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의 뜻과 상관없이, 부모의 욕심과 편견으로 말하면, 상처가 될 수 있다. ‘운동은 안 돼, 공부해! 그런 친구는 도움이 전혀 안 돼.’ 그런 말은, 자녀에게 부딪히고, 거칠 것이 된다.
‘부딪칠 것’(프로스콤마)는 ‘그루터기, (의도하지 않은)범죄, 실수, 거침돌’이다. ‘거칠 것’(스칸달론)은 ‘덫, 올가미, 함정, (의도적으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원하던 원치 않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강한 자들이 자기의 행위로, 연약한 자를 시험에 들지 않았는지, 비판해보도록 부탁했다. 이러한 일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 자꾸 남에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면서 어떤 것을 적용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여기서 ‘속된 것’(코이노스, 일반적인, 불경스런, 더럽혀진, 불결한, 거룩하지 않은)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모든 만물은, 부정하지 않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이 선한 분이기에, 그 분이 만든 만물도, 정결하기 때문이다. (창1:31上)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논쟁 중에 (막7:17中)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했다.
성령님도 이 사실을 확증해 주셨다. (행10:15中)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만물은 속되지 않다. 모두 다 깨끗하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만물을 속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속되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고기가 그 자체로는, 부정하지 않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지옥가고, 소고기만 먹어야 하는가? 그러나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속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기를 속되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고기를 먹는 순간에,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기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돈도 그렇다. 돈을 잘못 쓰는 사람이 나쁘지(살인, 인신매매)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비판이다.
2. 형제를 망하게 하지 말라(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여기에서 먹는 문제를 계속해서 말한다. 먹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일이고, 매일 행하는 일상적인 문제이다. 교회의 갈등은, 먹는 문제처럼, 우리가 평범하게 여기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소한 일도 무시하고 넘어가면,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질 수 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판은, 건전하며 바람직하지만, 그 생각을,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연약한 자들은, 고기를 먹으면, 즉시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이 자기 생각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면, 양심에 거리끼리는 일을 하고, 시험들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결단코,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의 비난을 존중해주고, 그들을 위해서 자기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상의 제물이다.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된다고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금했다. 모르고는 먹을 수 있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금했다. (고전8:7中)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고전10:18),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강요하면 ‘연약한 형제를, 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려서, 구원한 형제들을, 성도가 실족하게 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려서, 구원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큰 죄다. 그러므로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의 견해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형제를 망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망하게 하다(아폴뤼미)는 원래 ‘죽다, 잃다, 멸망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형제를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옳지 않다. 지옥은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8장에서,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단서가 (19-20)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망하다’의 반대말을 ‘세운다.’로 표현했다. 따라서 ‘망하게 한다.’는 말을, ‘세운다.’는 말의 반대말, 즉 ‘넘어뜨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넘어뜨린다.’는 무엇 뜻인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에게, 자기의 입장을 강요하면, 연약한 자들이, 양심에 상처를 입고, 실족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3.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17).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은 강한 자들이 가진 생각을 ‘선한 것’이라며, 잘못 행동으로, 그들의 선한 생각이, 비방 받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했다. 좋은 마음으로 이야기로 했어도, 비방을 당할 수 있다. 좋게 시작했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시험에 들게 만들면, 나쁜 것이 된다.
받아들이면 좋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원수가 된다.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억지로 넣어버린다면, 채할 수밖에 없다. 뒤에서 구시랑 거리는 것을 싫어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앞에서 다해버린다. 그리고 나는 뒤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런 생각은 상처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선한 말도, 비방하면 안 된다. ‘비방’(블라스ㅍ헤메오), ‘중상모략하다, 불경건하게 말하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고, 헐뜯는 말을 하다.’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그들이 가진 선한 생각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부탁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선한 말을 했어도, 비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연약한 형제들을 용납해야 한다.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음식 문제와 같은, 사소한 문제로, 하나님 나라를 무너지게 하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데에 있지 않고, 성령을 통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는 데에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항상 교회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유지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 사실을 잊고, 분열한 때가 많았다. 연약한 자를 섬겨주지 않고, 텃세를 부리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교회는 성령이 아니라,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기억하면, 사소한 문제로 다투지 않고, 성령 안에서 평화로운 곳을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령님 안에서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은, 무엇을 의미하나?
①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 들어가는 나라다.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언은 ‘칭의’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고, 자기 백성과 자녀로 삼아준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나라다.
② 하나님 나라는 ‘평강’의 나라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평강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하게 만들었다. 하나님 나라는 불화를 평강으로 바꾸어 주는 나라다.
③ 하나님 나라는 ‘희락’의 나라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슬픔과 근심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희락을 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이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희락을 준다. 이 희락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음식 같은 사소한 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무너뜨리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은, 의와 평화와 기쁨을 무너지게 만든 일이다.
①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서, 의롭게 만든 형제를, 망하게 하는 일이며 ② 다툼과 시기는, 공동체의 평강을 깨뜨리며 ③ 자기주장을 강요하면, 형제를 실족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문제로 더 중요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성령으로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기쁘게 할 수 있다. 사소한 문제로, 형제를 정죄하고, 다투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연약한 사람의 약점을 덮어주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다 기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 (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기쁘게 했다.
하나님은 성령의 힘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원한다. 성도들은 사소한 일로 인해, 더 중요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것들을 희생하더라도 성령을 통해,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는 길을, 추구해야 한다.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에, 성령을 좆아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의로워지고, 행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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