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2월 19일 - 성도 간에 비판하지 말라(롬14:9-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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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간에 비판하지 말라(롬14:9-12)
교회 안에는 다양한 계층과, 신분과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견해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바울 당시에 로마교회는, 음식과 날과 절기에 관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때 다른 의견을 비판하지 말고,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했다.
견해가 다른 형제를 멸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될, 2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① 하나님이 그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다(3). ② 형제를 비판하는 일은, 주인인 그리스도의 권한을, 범하는 일이다(4). 예수님은 우리가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주기에, 남을 비판하지 말고,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했다.
날을 중히 여기거나, 먹는 것도 주님을 위한 일이니, 이는 감사한 일이지, 비판할 일이 아니다.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다. 계속 비판을 금해야 하는, 이유를 더 추가한다.
1. 우리 인생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라(9).
“이를 위하여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목적이 ‘주를 위하여’가 되었다.
우리는 죄에서, 지옥에서 구원 받았기에, 삶의 목표가 ‘주를 위하여’로 변하였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정욕을 좇아 살았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명예와 쾌락과 재물을 위하여 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으로 살겠다고 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주님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생명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나를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지만, 우리의 삶도 있어야 되지 않나요? 나의 것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하면서, 나는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다면서,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한다.”고 한다. 이것은 종 된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산다면,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이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해놓고, 내가 주인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 피 값을 주고 나를 샀기에, 살든지 죽든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주님의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주님의 것이고, 세상을 떠나서도,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견해 차이가 있어도, 주님이 생명을 주고 구원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용납해야만 한다. ③ (10上)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이것이 다 수사 의문문이다.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너그럽게 대하라는 뜻이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면, 그 순간 그릇되게 된다. 약한 자는 믿음이 약하지만, 하나님이 받아주었음을 알고, 받아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성도들이 서로 멸시와 비판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운명공동체이며, 한 조상으로부터, 한 피를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실수하면, 모든 가족이 수치를 당하고, 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온 가족이 명예롭게 된다.
한 사람이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받았을 경우, 그의 영광은 온 가족의 영광이 된다. 그러나 그 선수가 패배하면, 온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이와 같이 가족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는 운명 공동체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가족이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 산, 한 가족이기에, 슬픔과 기쁨, 장점과 단점을 함께, 담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형제이기에, 성도들을 비판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 장단점을 함께 책임질 공동체임을 기억하고, 형제들의 단점을 용납해야 한다.
가족은 연약함을 덮어주고, 감당하는 탁월한 공동체이기에, 성도들은 서로 연약한 점을 감싸주고, 자기 일처럼 생각해야 한다. 비판하거나, 업신여긴다면, 하나님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이 되기에, 이런 일을 금해야 한다고 말한다.
술을 마시고, 교회에 오는 사람도, 예배를 드리다가, 중간에 나가더니, 담배 냄새를 풍기며 다시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내 옆에 앉아도, 우리는 찡그리지 않고, 기쁘게 맞이해 줘야 한다.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받아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강함과 약함의 문제다. 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가 죽어 사는 삶이, 바로 주님의 소유로 사는 삶이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술과 담배를, 먹지 말아야 하나? 아니면 먹을 수도 있나? 술과 담배는, 음식의 한 종류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일종의, 약한 마약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도, 음식으로 보면, 술과 담배를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술과 담배의 위험성을 알고, 그것을 대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술과 담배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술과 담배를, 먹는다고 생각하나? 일종의 호기심인가? 아니면 스트레스해소 방안인가?
그것도 아니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수단인가? 또 멋있어 보임이거나, 어른처럼 보이기 위함인 것인가? 이런 이유로, 술과 담배를 대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때로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치료제로, 의사의 처방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무조건 죄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술과 담배를, 마음껏 해도 좋다는 것도 아니다. 술과 담배는 한 번 접하면, 스스로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은,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며, 말의 실수를 유발하기도 하고, 그것이 음행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담배는 술보다 더 끊기가 어렵기에, 한 번 담배를 접해서 피면, 죽을 때까지 담배의 종이 될 수도 있다. 무슨 일을 해도 좋지만, 주님을 위하여 해야 하기에, 아무리 좋은 목적으로, 술 담배를 하고 있더라도,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2.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직접 심판받게 된다(10下).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성도들이 서로 멸시하거나 비판을 금해야 할 이유는, ④ 성도들이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심판대’(베-마)는 ⓵ 법정에서 죄인들을 재판하는 심판석 ⓶ 운동경기에서, 선수들을 심판하기 위한 심판대와, 상 받는 높은 장소다. 심판대에 앉은 사람이, 부정한 선수를 발견되면, 그들이 받은 상을 취소한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승리한 사람에게는, 축하와 함께 영광의 메달을 수여한다.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해 예고한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나님이 재판관이기에, 우리가 판사의 자리에 앉거나, 형제는 피고의 자리에 앉힐, 자격이 없다.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이때 불신자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받고, 불 못에 던져진다(계20:11-15).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지옥에 가는 심판은, 받지 않는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충성했는지,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를 추궁하여, 처벌하는 자리’가 아니고, 승리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 위한 자리다. 그때 주님은, 불법을 행한 사람들의 행위를 드러내고, 정당하게 일한 사람들에게는, 메달을 수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형제를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형제에 대한 비판을 금해야 할, 4번째 이유다. 만일 어떤 선수가, 부정한 일을 했거나 약물을 복용한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보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올림픽 위원회 안에, 이미 이러한 사람을 적발하고, 시정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벤 존슨이 약물복용으로 걸려, 퇴장 당했다. 선수들이 반칙한 사람을, 강제로 퇴장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경고하고, 퇴장시키는 일은, 심판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칙당한 사람이, 반칙한 선수에게 직접 보복을 하면, 보복한 선수도 역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이 행한 부정행위를, 직접 처벌하려고 하지 말고, 처벌을 심판에게 맡겨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성도들은 형제들이 연약해서, 그릇행할 때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심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형제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려고, 힘쓸 필요가 있다.
3.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사45:23)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권을 제시했다.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심판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 앞에, 다 무릎을 꿇게 되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감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동기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모두 다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성도들의 행위를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심판자인 하나님에게, 각자에 대해서 책임질 것이다. 각자가 자기에 대해, 보고를 할 것이다.
지금 형제의 일에, 쉽게 간섭하는 자도,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대신 보고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권을 찬탈하는 행위, 즉 형제를 판단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한다.
본인이 알아서 직고한다고 하니, 옆에서 자꾸만 부추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형제를 무시한 것에 대해, 직고(헤아투 로고스)하는 일이 있다. 자기에게 준 말씀을, 스스로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비본질 문제에 있어서, 남들의 확신과 행동에, 간섭할 시간과 여력이 있다면, 그런 시간과 여력을, 자신의 언행심사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보고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보고할 내용을 충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각자의 확신대로 살면 된다. 회의를 할 경우에는, 조율하고 결정하면 된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아디아포라’ 문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해서 하면 된다.
비본질 문제에 있어서, 남의 의견에 참견하면 안 된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평생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해서, 직접 보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항상 형제자매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① 하나님이 그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② 형제를 비판하는 일은, 주인인 그리스도의 권한을, 범하는 일이다. ③ 하나님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④ 자기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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