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2월 12일 - 주를 위하여(롬14:5-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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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위하여(롬14:5-8)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먼저 그들을 환영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믿어도, 믿음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비판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1. 각각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명시된, 안식일, 월삭, 절기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계속 이러한 날들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방인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복음 안에 있기에, 날과 절기에, 큰 관심이 없고, 자유롭게 행동했다.
따라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날과 절기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 당시에는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주일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사도들은 안식 후, 다음날을 주일로 삼고,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에도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교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유대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율법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안식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징계 받는다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어떤 교회는 지금도 주일에는, 신문도 TV도 안보는, 전통을 가졌다. 반면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 교회도 있다. 어떤 선교사가 안식년을 끝내고, 선교지로 돌아가는데, 출국하는 그 날이 주일이었다. 그래서 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어떻게 안식일에 배에서 예배 했느냐고, 교단에서 출교시켰다.
오지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님은, 달력이 없어서, 나름대로 주일을 정하고, 예배드렸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날이 월요일이었다. 그러면 그분은 그동안, 잘못된 예배를 드린 것인가? 옛날엔 교회마다 주일 저녁예배가 있었는데, 요즘은 오후예배로 바뀐 교회가 많다.
이라크를 비롯한 어떤 나라에서는, 화요일이 공휴일이라고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일을 지킨다고, 회사를 빠져야 하는가? 옳고 그름을 따지고, 비판할 일이 많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을 해도 좋다한다. 결혼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금식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주일예배를 후에, 운동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1부 예배도 좋고, 2부 예배도 좋다. 하나님의 구원은, 먹는 것이나, 어떤 날을 지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구원이나 기본적인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소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로,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없느냐로, 사람을 받는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이 받아주는 자녀가 된다.
따라서 우리도 동일하게, 주님이 받아주신 그 사람들을, 받아주어야 한다. 그러면 제7일 안식일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교회도,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복음과 거기가 먼, 주장을 한다.
안식일 문제라면, 이들도 기독교인으로, 받아주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안식일과 절기를 들고 나오지만, 실상은 다른 문제다. 안식일 교회는, 엘렌 G 화이트 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은 선지자라고 말하며, 화이트 부인의 말이,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계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계시를 거론하면, 이단이요, 성경은 저주가 있다고 한다. (계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구원받기에 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성경에 가감할 수 없다. 성령은 지금, 성경을 더 써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기록된 말씀을 조명해, 더 밝히 보게 만든다. 이것을 혼동하고, 지금도 하나님 말씀이, 계속 써진다고 하면, 이단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주 안×홍의, 4번째 부인 장×자가, 하나님으로 둔갑했다. 이런 이단들은, 안식일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다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요즘 인터넷에 이단들이,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글로 도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날짜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교주 문제)인데, 아주 교묘하게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했다.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다.
2. 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게 되었는가?
(1) 그리스도가 주일을 제정했다. 교회가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바뀌었다.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제정하사, 속된 용도에서, 특별하고 성스러운 용도로 구분했기에, 주님의 성찬이라 했다. 주의 날도, 특별한 예배와 봉사를 위해, 따로 구별해 놓았기에, 주의 날이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고전15:20),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고, 모든 인류에게 부활의 참 소망과 안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도, 안식일 이튿날인 주일이었다.
(2)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사도들의 관례였다(행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처럼 주일에 말씀을 강론하는 것과, 성찬식과 헌금이 있었다. 즉 주일날 그들은 모여서, 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들을 보면, 주일을 지켰다. 이그나시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으며, 속사도 교부로 불려졌다.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각 교회에 7개의 서신을 보내었다. 트라쟌 황제 통치 시기 (AD98-117년) 사이에, 순교 당했는데, 그의 “마그네시아인들에게”라는 서신을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가르침과 오래된 이야기로, 미혹당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아직, 유대주의의 관심을 계속 지킨다면,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옛 관심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소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에 의해 살고 있다. 그날에 그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안상홍 증인회와 안식교는, 이글에 ‘주님의 날’이라는 단어에 대해, ‘주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극구변명 한다. 그러나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속사도라고 불리는, 1세기의 초대교회 감독이 ‘안식일을 지키지 말자.’고 말했음이 중요하다.
순교자 저스틴은, 예배하는 날을 아예 “일요일”이라 했다. 일요일에 “빵과 물탄 술”을 나누었다는 기록도 있다. 성경을 번역한 제롬은, 이교도들이 이 날을, 태양의 날로 부른다면, 우리도 그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세상의 빛이 나타나고, 공의의 아들이 살아난 날이, 이 날이기 때문이다.”했다.
그러면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강제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라고 했는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321년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칙령을 내렸을 뿐이며,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지는 않았다.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렸기에, 휴일로 바꾼 것뿐이다.
(3) 안식일은 구약의 율법이며, 그림자이기에, 신약시대에는 폐하여졌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은, 나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며, 천국의 쉼을 얻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와 쉼을 얻게 된다. 그림자였기에, 실체가 왔기에 폐하여졌다.
모델 하우스는, 아파트 분양이 끝난 후에는, 다 없애버린다. 마치 이와 같이, 실체가 이루어지면, 모형과 그림자는, 폐하여지게 되어 있다. 안식일도 같은 원리에서, 폐하여 졌다. 실체가 되는 우리 예수님이 와서, 구원을 이루었기에,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면 된다.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은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따라서 실체인 예수님이 오면, 안식일은 폐하여질 수밖에 없다.
토요일을 지켜야만 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양을 제물로 잡어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느냐?’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기에, 속죄제도가 의미가 성취되었다. 이처럼 안식일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이, 옴으로 완성되었다.
(히4:3上)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이미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 짐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안식의 그림자인 안식일이, 폐하여졌다. 신약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구절은, 한 곳도 없다.
또 안식일이 지켰다는 기록도 없다. 구약성경에 그렇게 많이,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는데, 갑자기 신약성경에 와서, 안식일 명령이 전혀 없는 이유는, 폐해졌다는 강력한 증거다. 구약성경이 할례가 강조되다가, 신약성경에 전혀 할례의 명령이 없는 이유도, 할례제도가 폐했기 때문이다.
3. 무엇이든지 주를 위하여 하라(6-8).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2가지 입장을 모두 용납한 이유는, 그들이 모두 다 주님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제7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고, 모든 날을 똑같게 생각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날이 더 거룩하고 무슨 음식이 깨끗한 것인지가 아니었다.
금식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위해 먹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거나, 주님을 위해 많이 먹고 힘을 얻어서, 부르짖으며 기도하거나, 주님을 위해서 했다면, 내가 기준이 되어서, 문제를 삼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너무나 중요했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이 주신 날로 생각하고, 주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음식을 먹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음식을 하나님이 준 것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부정하다는 고기는 먹지 않았다. 그들은 채식하면서, 그들을 거룩하게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과 양심을 따라 했기에, 비난하지 말라는 말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를 위하여’가 목적이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려도 상대방의 결정을 비난하지 말고,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도 좋은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해 했는지가 중요하다. 성숙함과 연약함의 차이는 본질과 형식, 어느 쪽을 강조하는가에 있다. 형식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 본질을 알아 가는 것이다. 형식을 거쳐서, 본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은, 형식에 머물러 있다. 최적인 치장과 명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한다. 초대교회와 비교할 때,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 멋지게 지은 교회당, 우아한 사람들, 교양 있는 말씨, 각종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큐티도 하고, 목장도 있고, 기도회와 세미나가 넘쳐난다.
그렇지만 과연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렇게 외칠 수 있는가? 주를 위하여가, 인생의 목적이 되고 있는가? 주를 위하여, 날마다 영광 돌리는 삶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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