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2월 5일 - 믿음이 연약한 자(롬14:1-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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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연약한 자(롬14:1-4)
바울은 성도들에게, 교회, 원수, 국가와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다가, 갑자기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이제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했다. 이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교회 안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신분과 학력,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언제든지, 성도들 간에 의견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견해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차이를, 극복할 수 있나?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 주라(1上).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바울은 성도를 강한 자와, 연약한 자로 구분했다. ‘연약한 자’(아스네오, 병에 걸리다, 무력한 사람)를 말한다. ‘강한 자’는 복음으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받고(프로스람바노), 프로스(가까이에) + 람바노(취하다) = 곁으로 가까이 데려가다, 왕따 시키지 말고, 가까이 하라.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말이다. ‘단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로마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공존했다. 그들 중에 일부는, 기독교는 유대교 전통을 이어받은, 종교로 생각하고, 유대교의 관습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불렀지만, 일부는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로 생각했다.
그래서 복음의 원리와 맞지 않는, 유대교 관습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 했고, 그들을 ‘믿음이 강한 자들’로 불렀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사람들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갈등하고 있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생각이, 옳다고 전제하고, 그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용납하라 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유대인들은 ‘음식문제’와 ‘안식일’(절기) 문제에 있어서, 이방인들과 구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금한 음식을 먹으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안식일’(절기)을 지키는 일에도, 매우 철저했다.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해, 생명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이러한 규정을 준수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자들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사람들을 받아주라.’고 부탁했다. 음식문제와 절기문제에 대해,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받아주라 했다. 성숙하지 못한 판단을 하는 경우, 그들을 거부(무시)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금했다.
우리도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의견들을, 거부(무시, 비난)하지 말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고, 대화하고 용납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무조건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다.
복음을 해치는 수준이 아니라면, 받아줄 수 있다. 하나님도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되, 죄를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용납해 준다.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용납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을 인정하지도 않는, 모든 종교들이나, 이단 사상을 무조건 용납할 필요는 없다. 아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용납과 수용은,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허용될 수 있다. 이런 분별력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2. 연약한 자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下).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의견’(디아로기스모이)은, 디아(철저히, 통하여) + 로기조마이(작성하다, 계산하다, 생각하다.) = 철저한 생각, 즉 비판을 위한, 비판을 말한다.
‘견해차이로 망설이거나’,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의심스러운 점’이나, ‘논의의 여지가 있는’ 음식이나, 절기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는 일을 주저하고 있었다.
‘비판하다’(디아크리세이스)는, 디아 + 크리노(분리하다, 철수하다, 결정하다) = ‘논쟁’이나 ‘토론’, 또 ‘다투어서, 판단하는 일’을 의미한다. 비난하거나, 다투거나, 논쟁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교회를 논쟁을 위한 장소로,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피고석에 앉히고, 그들을 심문하는 법정이 아니다. 교회는 믿음이 약한 사람의 견해를, 존중하고 받아주는, 사랑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연약한 자들이 힘을 잃거나, 실족하게 되면, 그것이 문제이기에,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할 필요가 없는 문제들을 ‘아디아포라’(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불렀다.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문제를 말한다. 로마교회에 예전이나 행습들을, 개혁교회에서, 유지할 것인가, 폐지할 것인가 하는, 논쟁가운데 부각되었다.
칼빈은 춤과 카드놀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아디아포라’영역이라고 말했다. 아디아포라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관련이 있다(갈5:1, 요8:32). 춤이나 카드놀이는, 누가, 어떤 생각과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좋지 못한 행동이 될 수 있지만, 다르게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과 관습의 문제는, 토의대상이 될 가능성이 많다. 교회에는 이러한 문제들로, 토론이 일어날 수 있다. 복음의 기본정신과 관계가 없다면, 어떻게 판단을 내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다. 각 나라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관습이기에, 어느 것이 맞는다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의견’(疑見, 디아로기스모스, disputable, 의심스러운)이라고 부른다. 교회 안에는 계층과 신분, 재산정도와 학력이, 다른 사람이 모여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 따라, 신앙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지만, 얼마든지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 나라와 지방마다, 독특한 관습과 전통이 있기에, 각 나라와 지방에 따라, 독특한 교회 예식과 관습이 생겨날 수가 있다. 성도들은 이러한 비본질적인 문제로, 교회를 논쟁과 다툼의 장소로, 만들 필요가 없다. 성도들 간에, 견해 차이가 있을 때, 서로 금해야 할, 몇 가지 태도에 대해서 말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다. 또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도, 강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음식문제에 대해, 특별한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음식을 감사하며 먹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는, 음식문제에 대해 특별한 규례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레11장)의 규정을 따라, 먹어도 될 음식(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먹으며 안 되는 음식(죽은 것, 죽은 것을 먹는 것)을 구별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율법에서, 허용된 음식만을 먹었다.
특히 랍비가 먹어도 된다고 한, 율법에 따라 도축한 고기(רשׁכ 코셔)만 먹었다. 그러나 음식문제에 제한을 받은 사람은, 유대인만이 아니었다. 금욕주의자들도, 음식에 대해 철저히 규제했다. 단순한 삶을 강조하면서, 음식이나 의복을 가려먹고 입었다.
그중에는 육식을 금하고, 채식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적게 먹고 살기도 했다. (막7장)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변론한 적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다고 가르쳤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 씻지 않고, 음식 먹었다.
그들은 유대 장로들이 정한 규례를, 손을 잘 씻지 않고 먹는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18中)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고 했다(19).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라 했다(20-22).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3. 연약한 자도 하나님이 받으셨다(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바울은 성도들을, 2가지(믿음이 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로 분류한 후에, 그들에게 각각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먼저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모든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견해를, 멸시하지 말하고 부탁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기 쉽다.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연약한 사람들은 실족하게 만들 수 있다. 바울은 음식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시험에 든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다(고전8:13).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에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잘 났어 정말)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 가진 생각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들을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비난과 정죄로 인해, 교회 안에 분열이 생길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우상의 문제다.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설교에 잘못된 내용들이 많다. 어떤 분은 된다고 하지만, 성경은 금했다. 모르고는 먹을 수도 있지만 (고전8:7中)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 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고전10:18)고 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제 설교를 참조하기 바란다(2016년 9월 11일)
그러면 왜 성도들이, 연약한 자를 멸시하지 말고, 비난을 금지해야 하나? ①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들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육식을 금하는 사람들도, 용납해 주셨다.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축복해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받아준 형제들을,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멸시하고 비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그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약한 그를 이미 받았다. 따라서 신자들도, 그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주하라고 했다.
② 금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연약한 자를 받아줘야 하는 이유는, 남의 하인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성도들이 서고, 넘어지는 일이,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멸시하면, 그들의 주인인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다. 성도들이 옳은 생각을 하든지, 아니면 나쁜 생각을 할 때, 그들을 심판할 분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그들을 정죄하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자기 일꾼들을 깨우쳐주고, 다시 일으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련한 자녀에게, 지혜를 줄 수 있고, 넘어진 백성들을, 일으켜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비난과 멸시하는 태도를, 금지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내가 변화 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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