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월 22일 - 율법의 완성은 사랑(롬13:8-10)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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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완성은 사랑(롬13:8-10)
그 동안 국가에 대한, 성도의 납세의무에 대해 나눴다. 세금을 바치는 것도, 양심을 따라 바치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이 일에 항상 힘쓰니, 줄 것은 주고, 세금 받을 자에게 세금을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다.
이제 개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원수사랑(12:20)과, 국가사랑에 대해 말한 후에,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이웃사랑의 필요성을 3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1.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자(8上).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빚은 갚아야 한다.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갚아야 한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다.
(1)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나는 복음에 빚진 자’(1:14)라고 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 그래서 사랑의 빚 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모든 것이 사랑의 빚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받은 그 사랑을, 네 가까이에 있는 사람, 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주기를 원한다.”고 말씀한다. 성도들은 사랑의 복음을 먼저 받고, 용서 받았다.
그러므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육신과 정욕을 좆아, 죄를 지으며 살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었기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우리가 살다가, 경제적으로 빚을 질 때가 있다.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돈을 빌릴 때가 있고, 또 국가에 세금도 내야한다. 돈을 빌리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빚들은, 성도들이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이다. 빚은 지지 말고, 있다면 성실히 갚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면, 그 사람을 만나기 싫어진다.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파괴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금전거래를 하면 안 된다. 이것 때문에, 관계가 깨진다. 꼭 갚을 테니, 돈을 꿔달라고 하지만, 못 갚을 때가 많다.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왜 이렇게 달라고 하냐?”면서, 돈을 꿔 간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그래서 마음이 상해서 다투게 된다. 돈을 잃고, 친구를 잃어버린다. 신앙까지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래서 영혼도 잃게 된다.
그가 정말 불쌍하면,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줄 수 있는 만큼 그냥 주라. “내가 너에게 이만큼은 주고,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하고 끝내야 한다. 돈을 빌려간 분들이 있다면, 꼭 갚기 바란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서, 빚은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전문가들은, 빚도 중독이라고 말한다. 다른 중독들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으로 더 커지고, 증세가 깊어진다고 한다. 빚을 지고 살면, 인생이 비참해진다. 빚을 갚으려고, 또 다른 빚을 지는 사람은, 인생이 비참해진다. 빚을 내야 되니까, 자꾸 거짓말로 숨기게 되고, 관계가 순수하지 못하다.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 자녀, 부모형제, 이웃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게 된다. 그래서 살던 집을 팔아서, 전세나 월세로 가고, 사업체를 운영하던 분이, 떡볶이 포장마차를 하고, 책임지기 위해, 옥에 가는 분이 있다.
이들은 사랑의 빚 이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않기로 작정한, 성도들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려면, 어떠한 빚도 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공동체 안에서, 돈거래를 하지 말라. 그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우리가, 빚을 져도 괜찮은 것이 있다. 사랑의 빚이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의 빚은, 지면 질수록, 사랑이 풍성해지고, 참된 기쁨이 생긴다. 하나님은 이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이 땅 위에 행한다.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났다. 이는 부모님에게 진, 사랑의 빚이다. 돈으로 진 빚은 갚기 쉽지만, 사랑의 빚은 갚기 어렵다. 성도들은 이웃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남이 만든 신을 신고, 남이 만든 옷을 입고 있으며, 남이 만든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든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을 위해, 빚진 자의 마음으로, 꼭 갚겠다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서로 사람들이,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도록 만들었다.
빚은 갚지 않으면, 사기꾼이나 절도범이 되지만, 사랑의 빚은, 갚지 않아도, 죄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남에게 받은 사랑을, 모두 갚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했다. 사랑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모두 기쁘게 한다.
우리는 남에게 사랑을 받고, 베풀 때에, 자신이 세상을 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도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받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2.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8下).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다(마22:37-40). 따라서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게 된다. 우리는 율법과 사랑을, 반대로 생각하기 쉽다.
율법은 부정적이며(…하지 말라), 사랑은 긍정적이라 생각한다(…을 하라). 그러나 사랑과 율법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어졌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것을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처럼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상황윤리 주의자들은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규정된 것이 없다.’며, 모든 율법을 무시하고, 사랑만이 판단기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율법을 무시하면 안 된다. 율법은 사랑을 실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규정들이 없으면, 사랑은 추상적으로 된다.
사랑은 ‘율법의 끝’이라, 하지 않았다,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 사랑을 실천하려면, 기준이 되는 율법이 필요하다. 율법이 실천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사랑하기에 불쌍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우리 몸도 드리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선교현장에 달려간다. 이런 마음을 볼 때, 큰 감동을 받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당한 분을 위로하게 된다. 독거노인, 장애자, 고아, 불우청소년에게 사랑을 베풀게 된다.
소년소녀가장들을 돌보고, 연탄을 배달하고, 쌀을 배달한다. 노인들을 안마도 해주고, 발도 씻어준다. 수학,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은혜와 은사를 나누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이, 사랑을 완성해가는 모습이다.
성도들이 받은, 최고의 사랑의 빚은, 복음의 빚이다. 따라서 사랑을 갚는 최고 비결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빚이다. 따라서 복음전파는, 성도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의 태도를 보인다. 그렇지만 오래 믿으면, 빚진 자의 의식이 사라진다. 감사한 마음은 사라지고, 자신의 공로만 남는다. 사랑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부모와 자식관계도 그렇다. 자녀들이 점점, 빚진 자 의식, 감사가 사라진다. 부모에게 요구사항만 커져간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요구사항만 많아지고, 서로가 빚을 주었다는, 채권자의 마음을 갖는다. 빚진 자의 의식이, 아름다운 자녀와, 아름다운 가정을 만드는, 토양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변화된다는 말은, 스스로 채권자라는 의식을 버린다. 빚진 자의 의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채권자의식을 가지면, 피해의식이 생긴다. 우리는 피해 받은 것이 없다. 구원받았고 지금까지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모두 다 공급해주었다. 우리는 100% 빚진 자이다.
그런데 계속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섭섭한 사람이 있다. 특별히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왜 안 알아준다고 원망하는가? 그것이 기복신앙이다. 왜 기복신앙이 나쁜가? 하나님조차도, 채무자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줄 모르고, 자신은 충성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빚진 자의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고,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서, 죄의 권세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8:3-4).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책감과 죄의 세력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3.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웃사랑이 어떻게, 율법을 완성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율법의 두 번째 돌 판에 나오는, 금지사항들을 인용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간음, 살인, 도둑질, 탐심, 거짓 증거 등을 금지하라고 명했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이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한 명령 안에, 계명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지 말한다. 십계명의 각 조항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꼭 준수해야 할 사항들이다.
살인은 이웃의 생명을 탈취하고, 간음은 이웃의 가정을 탈취한다. 도둑질은 이웃의 재산을, 탐욕은 남의 것을 탈취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러한 부당한 행위들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노력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탐내겠는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다. 다주고, 그것을 탐하지 않는다. 나는 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탐하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용서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면, 용서할 수 있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모든 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말씀 안에 다 들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는 말씀은 옳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라고 말씀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아가페)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처럼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 규정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라, 이전부터 성도들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할 힘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
사랑의 실천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켜 주며, 동시에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사랑은 무엇을 하기보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배우자를 아프지 않게,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고, 헐뜯지 않는 것이다.
남이 성공하면, 그대로 그것을 놔두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그를 조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끌어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사나워졌나?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살벌해졌나? 자꾸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커져 가는가? 사랑이 메말라 가기 때문이다.
우리 가슴에, 따뜻함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회는 더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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